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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사의 쓸모
주례사의 쓸모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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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병원 탁구동아리 활동을 즐겁게 같이 하던 젊은 직원 하나가 어느 날 내게 주례를 부탁했다. 병원장으로서 해야 하는 일의 스펙트럼이 의료의 질 향상과 환자의 안전관리부터 장례식장 매점 선정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주례까지 서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당황스러웠지만 직원의 간곡한 청을 모른 체할 수 없어 마지못해 오케이 했는데 그날부터 고민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교장 선생님 훈화나 목사님 설교보다 더욱더 제대로 듣는 이 없는 게 오늘날의 주례 말씀 아니던가. 듣는 이 없으니 누군들 내용을 기억하겠는가. 그저 눈도장 찍는 게 목표인 대다수의 하객들은 축의금 전달과 함께 식당으로 직행한다. 기념촬영을 위해 식장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실컷 잡담하다가 주례사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짜증스러운 얼굴로 연신 시계 들여다보기에 바쁘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은 어쩌면 이런 결혼식 주례의 심경을 묘사한 말이 아닌가 싶다.

의과대학 학장을 지내셨던 모교의 은사님 한 분은 밀려드는 제자들의 주례 부탁을 관리할 수 있는 나름 창의적인 방법을 개발하셨다. 비결은 주례사 중간에 신랑, 신부의 학점을 공개하는 것. “신랑 3.5, 신부 4.0” 하는 식으로 하객들 앞에서 학부 성적을 큰소리로 외치시니 성적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교수님께 주례 부탁하는 커플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주위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으나 주례의 난감한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분의 고육지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으로 주례 부탁을 받았다는 내 말에 우리 식구들 중에는 특히 딸아이가 질색을 했다. 아빠가 갑자기 훅 늙어 보이는 느낌을 받았나 보다. 소설가 김훈이 자기의 주례 경험을 몇 가지 적어놓은 에세이의 제목이 <꼰대는 말한다>였던 걸 보면 이런 선입관이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김훈의 주례사 내용에 ‘인스턴트 음식 사 먹지 말고 부부가 요리를 배워 함께 해 먹는 게 중요하다’라든가 ‘배우자 부모의 생일을 잘 챙기고 명절 때 꼭 인사하라’ 등과 같이 고지식한 당부들이 등장하니, 소설가 본인 말마따나 뭇 주례들에겐 ‘구제불능의 꼰대’ 이미지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약속된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기에 난 가족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서둘러 주례사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은 레지던트 시절 논문 쓰기 훈련을 받은 대로 선행연구, 아니 선행주례사에 대한 리뷰부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참고문헌이 될 만한 주례사들을 일일이 골라낸 다음 이들을 차곡차곡 카테고리별로 분류한 것이다. 개중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짧은 주례사, “너를 보니 네 아비 생각이 난다. 부디 잘 살아라”처럼 독특하고 임팩트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몇 가지 평이한 주제로 집약되었다. 한참을 정리하다 보니 꼭 기존 주례사들에 대한 ‘체계적 문헌고찰’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 ‘연구’의 결론을 내 주례사 원고에 세 가지 한자성어로 옮겨 적었다. 첫째,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二心異體)’임을 명심할 것. 둘째,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질 것. 셋째, 평생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견지하며 살 것. 말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변주들이 있었지만, 문헌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신 있게 말하건대, 이것이 국내 거의 모든 주례사를 관통하는 3가지 키워드다. 평범하지만 만고불변인 핵심 메시지를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이때 명심했던 두 가지 포인트는 ‘짧게’ 그리고 ‘유머를 섞어서’였다.

다행히 나의 주례 데뷔전은 평이 나쁘지 않았다. 우선 신랑, 신부로부터 진심 가득한 감사 인사가 있었고 복수의 하객들로부터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멋진 주례사였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흐뭇하고 조금은 우쭐하기까지 했는데 그때 서늘하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 주례사를 내 아내가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주례사 원고를 집에서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슬며시 치워둘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곤혹스러운 주례 요청은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 상황이 최악을 치닫던 시점에 병원 직원 한 분이 맏아들 혼사의 주례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왔다. 사연인즉 코로나로 인해 몇 차례 연기한 결혼식인데 가족 중에 암투병하시는 분의 상태가 나빠져서 더는 미루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겠다’ 대답하고 날짜를 물었더니 일주일 후였다. ‘에고, 이건 뭐 내가 무슨 예식장 소속 전문 주례도 아니고...’ 한숨 중에 불쑥 떠오른 아이디어는 때가 때이니만큼 ‘코로나에서 배우는 결혼 생활의 지혜’였다. 늘 머릿속에 있던 방역지침들을 주례 버전으로 한번 바꿔보자고 마음먹으니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 인생에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위기가 들이닥칠 때를 대비해 세 가지 마음을 갖자고 했다. 평정심, 책임감, 그리고 배려심. 역시 유머와 위트를 버무려 명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했고 마무리로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몇 차례 사용했으나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재활용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남아프리카 인사말이다.

나중에 신랑 아버지가 주례사를 거의 외울 정도였던 걸 보면 급히 준비한 것 치고는 이것도 성공적이지 않았나 싶다. 희한하게도 두 번째 주례를 마친 직후 또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았다. 조용히 주례사 원고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었다. 신혼부부에게 전달한 말이건만 나 역시 늘 지니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 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그때 주례사의 확실한 쓸모 한 가지를 깨달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 형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게 해주는 훌륭한 텍스트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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