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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들을 신라시대로
여의사들을 신라시대로
  • 전성훈
  • 승인 2021.02.02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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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09)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우리 역사는 흔히 ‘반만년’이라고 칭해진다. 그리고 그 유구함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평가 중에서 일정 분야에 대한 평가는 예외적으로 일치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우리 여성의 지위에 대한 것이다. 간략히 요약하면 ‘남존여비’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흔한 인식과는 달리, 우리 역사에서 여성은 ‘완벽히 동등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상당히 동등한’ 수준의 지위를 누려왔다. 우리 역사의 90% 이상의 기간 동안 말이다.
 
2,000년 전에 기록된, 우리 민족의 풍습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자.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남존여비를 언급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이와 유사하게 보이는 내용으로는 ‘부인이 질투하면 죽인다’는 부여의 풍습을 들 수 있는데, 인구 증대라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지배층의 일부다처가 흔히 허용되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이를 남존여비로까지 보기는 어렵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데릴사위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사위가 아내를 데려가는 대가로서 처갓집에 가서 함께 살면서 수년에서 수십 년(!)까지 일해 준 후에야 비로소 분가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모계혈통의 강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풍습이 많았고, 어느 모로 보나 남존여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풍습이 계승되어, 국가가 정립된 삼국시대에도 여성의 지위는 사실상 동등했다. 신라의 예를 보면, 여성이 가장으로서 집안을 대표하거나 가문을 계승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국가도 금품과 관직의 하사에 있어서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정치참여 분야를 보더라도, 신라 건국시조인 혁거세뿐만 아니라 그 왕비인 알영의 탄생설화도 함께 전승되었고, 알영은 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존숭되었던 것, 3명의 여왕이 즉위하여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 왕위를 (딸의 가족인)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하기도 한 것 등을 보더라도, 여성 및 모계혈통의 정치참여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에는 어떠했는가? 발해의 풍습에 대해 사서에 이런 기술이 있다. ‘발해의 부인들은 질투가 심하다. 다른 집 부인들과 10자매(=의자매)를 맺고, 번갈아 각 남편들을 감시하여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서 여자를 만나면, 반드시 모의하여 그 여자를 독살한다(!). 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그 아내가 이를 알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몰려가서 비난한다(“정신 차려 이 X아!”).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는 모두 기생이 있고 귀족 남자들은 첩을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10명의 부인들이 몰려다니며 서로 남편들의 바람기를 감시한다니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남편의 바람기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가 도저히 남존여비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 여성 역시 남성과 거의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사회가 여성의 정조관념, 그에 앞선 성적 수치심과 ‘바른 행실’을 강조한다면 이는 대표적인 남존여비의 징후이다. 하지만 여러 중국 사서는 ‘고려인들은 매일 아침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는데, 남녀가 뒤섞여 목욕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남존여비에 근거한 가부장제가 일찌감치 확립된 중국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낯 뜨거운’ 장면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재산은? 상속에 있어서 아들과 딸은 동등했고, 심지어 시집간 딸도 동등했다. 부모의 부양과 제사(또는 이를 위한 비용)도 아들과 딸들이 동등하게 부담했다. 이혼은? 정당한 이유가 있고 당사자와 양쪽 집안의 합의가 있으면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왕비가 왕이 싫다고 이혼하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남편이 부모 양해 없이, 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관직에서 파면되거나 유배를 가기도 했다. 재혼은?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재혼하여 낳은 자식(‘서얼’)을 철저히 차별했기에 엄마가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재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이런 것이 없었으므로 재혼은 자유로웠다. 시집살이? ‘내돈내산(내 돈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좋아서 함께 산다)’인데 누구 눈치를 보겠는가? 유일하게 제한된 권리는 ‘공무담임권’ 정도였고, 그 외의 여성의 권리는 확고하게 보장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여성은 남성과 비교적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유학의 영향으로 차츰 나빠지다가, 왜란·호란을 겪고 지배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던 조선 중기부터 지배층의 수구적 반동으로 근본주의적인(즉 여성을 핍박하는) 성리학 이념이 강조되면서, 이때부터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헬조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350년간 지속되었고, 최근 30년간 거의 극복되었다. 우리는 이제야 ‘고려시대’로 복귀한 것이다.
 
한국여자의사회 윤석완 회장은 80년대 후반 의사단체에 처음 참여했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여의사는 구색 맞추기였다. 남자들 세상이었다.’ 30년 전, 우리나라의 의사단체들은 ‘조선후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급격히 변화했고, 의사들의 인식도 변했다. 예를 들어 현재 서울특별시의사회의 여성 이사 비율은 28.6%에 달한다. 전체 의사 중 여성 의사 비율인 26.5%보다 더 높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대한의사협회의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회에서 여성 대의원 비율이 4%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의사들이 앞장서서 참여 의지를 보여줄 필요도 있겠지만, 이에 앞서 여의사들의 회무 참여를 장려할 수 있는 제도의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치권은 비례대표 중 일정 비율로 여성을 공천하도록 하고, 지역구 후보에 입후보한 여성은 당내 경선에서 일정 비율의 가산점을 부여한다.
 
우리 여성들의 능력이 세계적 수준임은 골프 분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회무 참여에 대한 역량과 의지를 갖춘, 준비된 여의사들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의료계에 큰 손실이다. 다가오는 4차산업시대는 사회의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는 ‘여성시대’가 될 것이다. 이 여성시대를 적어도 ‘고려시대’로, 가능한 ‘신라시대’로 복귀시킬 수 있도록, 새로 구성될 의협 집행부의 전향적 논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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