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너지?
만년필, 너지?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2.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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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3〉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우리 병원을 방문한 서울시의사회 회장님이 예쁜 선물을 주고 가셨다. 서울시의사회 로고가 선명한 만년필 한 자루. 물론 하얀 육각별이 그려져 있다든지 화살촉 모양의 클립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카트리지 타입의 수수한 보급형 만년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녀석으로 인해 잠시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예전엔 중학교 입학 선물로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게 단연 만년필 아니었던가. 볼펜으로 필기하면 필체를 버린다고 손에 잉크가 시커멓게 묻어도 만년필로 정성껏 한 자 한 자 노트를 메워가던 기억이 새롭다. 

어쨌거나 볼펜은 고객 만족을 위해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이룬 반면, 세월이 가도 별 변화가 없고 관리마저 불편한 만년필은 대중용 필기구로서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지금은 기껏해야 과시용으로 일부 고가 브랜드만 명맥을 유지하는 듯하다. 이들의 주목적은 '싸인'이기에 펜촉이 제법 굵어야 폼나게 이름을 휘갈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 놓고 가신 만년필에는 서명용이 아니라 필기용으로 쓰이는 가느다란 촉이 박혀있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추억을 한 아름 머금은 필기용 만년필을 선물 받았으니 뭐라도 쓰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는데 도대체 뭘 써야 하나. 일단 노트부터 하나 구해서 맨 첫 페이지에 ‘적자생존’이라고 적었다. 신세대들의 기발한 풀이대로 ‘뭔가 열심히 적어야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억력 감퇴를 체감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대단히 시의적절한 슬로건이다. ‘적자생존’을 실천하기에 가장 손쉬운 콘텐츠는 매일 있었던 일을 끄적이는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몇 십년 만에 처음으로.

2020년 첫날에 시작한 일기는 1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다. 병원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회의 장면이 지루하게 적히기도 하고,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며 예산 늘려달라 읍소하는 애처로운 상황이 기록되기도 한다. 사무실에서 틈틈이 일기 쓰는 내 모습을 본 우리 과 선생님들은 ‘무슨 사초(史草)라도 작성하느냐’며 나의 과도한 다이어리 사랑을 놀려댄다. 물론 나중에 우리 기관의 야사 편찬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도 더러 있지만 내 일기장에는 가족이나 동료들과 일상에서 누리는 작은 행복들이 훨씬 더 많이 담긴다.

‘적자생존’이라는 작년 새해 결심을 완벽히 실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이어질 좋은 습관으로까지 정착시키는 데는 만년필의 힘이 컸다. 사실 회장님께 받은 선물의 약발은 6개월쯤 지나니까 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큰맘 먹고 이태리제 만년필을 하나 더 샀고 그 덕분에 또 일기를 열심히 쓰게 됐다. 역사이자 추억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나의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리처드 탈러가 쓴 행동경제학 분야의 명저 ‘넛지(nudge)’가 떠오른다.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올바른 한글 철자는 ‘너지’다. 딱히 의도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회장님이 내 삶에 슬며시 개입하셨고, 그 ‘너지’ 덕에 바람직한 행동 변화가 유도된 것이 틀림없다.

흔히 ‘너지’의 가장 유명한 사례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그려진 파리가 회자된다. 그거 맞히겠다고 소변 줄기를 정조준해본 남성들은 많겠지만 파리 한 마리가 화장실 청소 아주머니들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 조그만 파리 그림 하나가 뭇 남성들의 오줌 누는 방식을 슬쩍 변화시켜 소변기 밖으로 튀는 파편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피아노 계단은 또 어떤가. 계단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나게 했더니 바로 옆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었다. 건강을 위해 계단을 이용하자고 목청을 높이고 요란한 표어를 붙여놓지 않아도 사람들 행동이 슬그머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책에서 보았던 ‘너지’의 힘을 만년필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나니 이런 류의 행동방식 교정에 급격히 관심이 생겼다. 공공병원의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직원들을 리드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는 채찍과 당근은 너무나 보잘것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채찍은 가벼워 무기력하고 당근은 비싸서 많이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효과가 괜찮은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만년필 한 자루가 상기시켜준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인데, 유독 우리병원 구내식당은 점심시간에 너무 붐빈다. 이 밀집, 밀접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번 끝자리 홀짝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12시 30분을 기준으로 홀수 날은 홀수 사번이 먼저 먹고 짝수 날은 반대로 한다. 그런데 이게 잘 지켜지지 않고 강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추가했다. 식당 컴퓨터에 사원증을 태그할 때 지정 시간을 어긴 사람은 모니터에 인적사항이 빨간색으로 나오게 했다. 빨간색이 찜찜하고 주변의 시선을 끄니 앞으로는 부디 홀짝제를 잘 지키도록 슬며시 개입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입원환자들은 코로나 19 검사를 무조건 다 받아야 하지만 보호자들까지 검사를 억지로 전부 시킬 수는 없고 적극적으로 권고할 뿐이다. 이 상황이 늘 방역의 사각지대처럼 염려스러웠다. 역시 슬며시 옆구리 찌르는 방법을 한번 적용해 보기로 했다. 보호자들 목에 거는 이름표에 코로나 검사를 받은 사람들은 노란색 표식을 붙여준 것이다. 의료진들은 그걸 보고 안심할 수 있고 보호자들끼리는 서로서로 검사 안 한 사람들에게 눈치를 줄 수도 있고. 

효과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런 궁리를 해보는 게 재미있고 보람 있다. 혹시 실패하면 또 다른 ‘만년필’을 생각해 볼 것이다. 채찍은 물렁하고 당근은 비쌀 때 이런 ‘너지’를 고민하게 해 준 서울시의사회 회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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