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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종류
자식의 종류
  • 전성훈
  • 승인 2021.01.19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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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07)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필자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못한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겠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업무에 쫓기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게다가 갈등이 심한 드라마는 더욱 보지 않는데, 직업상 항상 갈등을 대리경험하며 살고 있기에 쉴 때만이라도 ‘조용히’ 쉬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륜/막장드라마는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장르이다.

필자의 지인 중 ‘한드의 제왕’이 있다. 자타공인 안 본 한국드라마가 없는 그에게, 예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궁금하여 물었다. ‘불륜드라마 중에 최고작은 뭐냐?’

필자는 ‘그 많은 불륜드라마 중에 최악의 막장 상황을 상상해낸 드라마가 뭐냐?’라는 뜻으로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런 답을 했다. ‘SBS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드라마가 있어. 보고나니까 불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
마치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대화처럼, 필자의 속물적 질문에 대해 그가 날린 철학적이고 재미없는 답변은, 금방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한참 나중에 문득 그 드라마의 제목이 기억나서 시놉시스를 찾아보았다. ‘대학교 입학 직후부터 소문난 CC로 연애하다가 결혼한 A녀는, 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릴 때에 남편 B남의 외도를 알게 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어린 시절 밖에서 아들을 낳아온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남편에 대한 증오 속에서 산 엄마를 보고 자란 C녀는, 절대로 남편 D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아왔다.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던 C녀의 삶은, 남편 D남과 A녀의 불륜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역시 뻔한 스토리’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잖아도 복잡한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에서 아들을 낳아온 남편을 평생 증오한 아내’라는 설정만은 기억에 남았다. 이는 법적으로 많은 이슈를 담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자식들은, 그 속 썩이는 다양한 형태와는 달리, 딱 두 종류밖에 없다. 친자(親子)와 법정친자(法定親子)이다. 친자는 부모(親)가 낳았으므로(生) 친생자라고도 한다. 법정친자는 법률이 친자와 동일한 관계를 인정해 주는 것인데, 흔히 양자(養子)라고 한다.
 
친생자 역시 두 종류밖에 없다. 혼인 중에 태어난 혼생자와 혼인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이다. 그리고 혼생자와 혼외자의 법적 지위와 그를 둘러싼 상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위 드라마에서 ‘밖에서 낳아온 아들’이 가정에 일으킨 평지풍파처럼 말이다.
 
출산 직후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처음 보여주면서 하는 말은 거의 예외 없이 ‘당신 닮았지?’라고 한다. 출산 사실 자체로 친자관계가 확인되는 모자관계와는 달리,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부자관계는 일종의 막연한 신뢰에 불과했다. 그래서 남녀 공히 부자관계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려는 본능이 무의식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정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가 없다면, ‘발가락이라도 닮아야’ 안심하는 것이다.
 
60년대에 민법이 제정되면서 이러한 사람들의 본능을 담아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부자관계에 대한 막연한 신뢰에 강력한 법적 효력까지 부여했다. 즉 혼인 중 생긴 아이의 아버지는 일단 남편으로 볼 것이니, 이를 부정하고 싶으면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내에 소송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거나 또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이가 태어나면? 이 경우 수천 년 동안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라는 진부하고 심각한 분쟁이 발생해 왔다. 그래서 민법은 임신과 출산시기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혼인 성립의 날부터 2백일 후 또는 혼인관계 종료의 날부터 3백일 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리 법으로 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법이 현실을 모두 담지는 못한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해 왔다.
 
X녀는 2012년 2월 남편인 Y남과 협의이혼하고 그해 10월 딸 Z를 출산했다. 상황상 Z는 Y남의 아이가 아니었고 유전자 검사 결과도 명백했지만, 법에 따라 일단 Z는 Y남의 아이로 가족관계기록부에 기재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송을 하지 않고는 아이의 아버지를 바꿀 수 없게 되자, X녀는 이런 법조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그러자 헌법재판소는 “이혼 후 6개월간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던 민법 조항이 2005년 삭제되고 이혼숙려기간 제도 등이 도입되면서 이혼 뒤 300일 내에도 전남편의 아이가 아닌 자녀를 출산할 가능성이 증가했다”면서 “사정변경을 고려하지 않고 예외 없이 ‘300일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고 판시하고 헌법불합치(≒위헌)를 선언했다.
 
60년 전에 위와 같은 법조항이 만들어 진 것은 납득이 간다. 법적으로는, 유전자 검사 같은 것이 없었던 시절에 어떤 이유로 ‘찜찜함’이 있다고 하여 친족관계의 시작점인 부자관계를 불확실한 상태로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후손에 대한 간절함이 더 강했음에도 난임이나 불임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 조카나 심지어 남의 자식도 데려다가 훌륭히 키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법조항은,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을 더 중시하던 시절에, 1년을 키웠다면 찜찜함이 있더라도 이제 접어두고 자식임을 받아들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막연한 신뢰를 가지라고 아버지를 압박할 필요도, 아버지를 바로잡기 위해 태어난 아이와 엄마가 힘들게 소송을 거치게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부, 모, 자 모두가 불만을 갖지 않는 상식적인 세상이 된 것은 의사들의 노력에 따른 의학의 발전 덕분이다. 이른바 의료악법의 입법 시도 등을 보면서 의료계는 정부나 국회로부터 일방향적 압력을 받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이와 같이 사회에 끊임없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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