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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희생의 법적 확인 절차
고귀한 희생의 법적 확인 절차
  • 전성훈
  • 승인 2020.12.15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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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03)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있다. 90년대 말 출시된 이 PC게임은 창의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장엄한 결말은, ‘태사다르’라는 프로토스 종족의 고위 집행관이 우주함선을 몰고 저그 종족의 두뇌인 오버마인드(overmind)에 충돌하여 자폭하면서,
‘Remember us. Remember what was done here today.’라는 말을 남기는 장면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희생’이란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이고 장엄한 행동이다.
 
희생(犧牲, sacrifice)이라는 말은, 희(犧: 아껴 기르다), 생(牲: 제사에 쓰이는 가축)이라는 한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래 제사에서 산 제물을 바치는 것, 또는 그 산 제물을 뜻하는 말이었다. 제사에서 산 제물을 바쳐 신에게 진심을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관습은, 아벨이 어린 양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구약성경 창세기전의 기술에서부터, 신축공사 착공식의 고사상에 올려놓는 돼지머리까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낳은 이 단어는, 종교적 믿음이 차츰 사라지면서 행위의 대상(신에게)은 잊혀지고, 사람들은 행위의 목적(무엇을 위하는)과 결과(죽음)만을 기억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세/근대에 이르러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재산·이익 따위를 버리는 것’ 등의 의미로 변화되었다.
 
그러자 이 의미가 변화된 희생은 예술가와 창작자들로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 특히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숨을 바치는 모습에서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이 극복된 극적인 상황을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을 지우고 인간을 다시 그려나가려 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예술가들은 ‘고귀한 희생’을 그림과 글로 묘사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신에 가까운 본질, 즉 무한한 이타성을 발견할 수 있음에 흥분했을 듯도 하다.
 
그러나 한편 희생은 자발적이어야 단어의 의미에 부합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희생은 희생의 탈을 쓴 살인에 지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태평양 섬들에 군인들을 배치해 놓고, 의복과 식량 등은 현지에서 보급하라고 명령했다. 군인의 목숨보다 다른 군수물자를 중시한 이러한 명령의 결과로,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군 전사자의 60% 이상이 ‘굶어’ 죽었다. 스무 살 먹은 자국의 젊은이들을 소모품으로 보았던 이러한 일본군 지휘부의 시각을 보면, 일본이 예찬하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과연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느 의미로 보나 희생임이 명확한 사례도 있다. 바로 고 임세원 선생님 사건이다.
 
그러나 그를 의사자로 인정하여 달라는 유족과 의료계의 요청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의사상자심의위원회 심의 결과에 따라 작년 6월 의사자인정을 거부하는 처분을 내렸다. 당시 뉴스는 ‘도망가!’라고 외친 정도로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한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보도하기도 했고, 온라인에서도 ‘슬프다고 의사자로 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이에 유족들은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올해 9월 서울행정법원은 고 임세원 교수님을 의사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거부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법조계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판결을 이끌어낸 것에는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의 성실한 변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CCTV 영상은 단 11초였지만, 여기에 담긴 고 임세원 선생님의 모습과 행동은 뉴스에 보도된 것과는 달리 매우 복잡했고 다양했으며,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망가!’라는 말은 단 1초면 끝나지 않는가. 나머지 10초 동안의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칼을 쥔 남자가 바로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왜 11초 동안 탈출구를 찾아 전속력으로 탈출하지 않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변호사는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보았다.
 
나름의 이유를 파악한 후 변호사는 이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1,200쪽이 넘는 형사사건 기록에도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병원과 진료실의 구조, 비상 탈출 경로 등을 파악했다. 그리고 ‘비교 동영상’, 즉 ‘실제 상황’과 ‘그가 위험을 인식하고 바로 탈출하는 가정적 상황’을 재연하여 촬영한 동영상을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면서 변호사는 ‘그가 자신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이 적어도 3초 이상 지속되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을 무릅쓰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러자 재판부는 이 비교 동영상을 법정에서 직접 재생하여 증거조사했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이를 시청한 후 “현장검증보다도 더 생생한 동영상 증거를 잘 보았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판결 결과는 앞서 본 것과 같다.
 
1991년작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소년 존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어른 존 코너가 보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은, ‘운명의 날’을 막기 위해, 즉 아무런 전자회로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용광로에 집어넣는다. 비록 임무에 충실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기계’로서의 로직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인간’ 존 코너와 사라 코너는 눈물을 흘린다. 기계의 희생조차도, 희생은 인간에게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2주 후면 고 임세원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2주년이 된다. 비록 고 임세원 선생님의 숭고한 희생으로 쉽지 않은 관련법 개정을 비롯하여 경찰관서와 의료기관과의 응급연락체계 구축 등을 이끌어 냈지만, ‘의사가 안심하고 환자를 볼 수 있는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이라는 목표를 향하여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상대방과 싸우는 것은 어렵지만 편견과 싸우는 것은 더 어렵다. ‘이기적인 의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했겠어?’라는 보이지 않는 편견이 최초의 의사자 불인정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고귀한 희생이 법적으로 확인되는 절차는, 경우에 따라 이와 같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이번 법원 판결을 듣고 고 임세원 선생님은 천국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래요,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했군요.’ 속세에 남은 우리는, 그가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들로부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받았던 것에 분명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제야 분명히 했다. 성실히 직무를 수행한 변호사님 덕분에, 필자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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