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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와 예방접종
에피쿠로스와 예방접종
  • 전성훈
  • 승인 2020.11.03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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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99)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의무교육과정을 마친 분들은 에피쿠로스를 잘 아실 것이다. ‘국민윤리’ 세대인 필자 역시 잘 알고 있다. 국민윤리 선생님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에피쿠로스’라고 하면 ‘쾌락주의자’가 자동으로 나올 때까지 수없이 쥐어 박혔으니까.

그런데 후대인들로부터 쾌락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정작 당사자인 에피쿠로스는 억울해 할 것이다. 쾌락주의라고 하면 왠지 관능적이고 에로(?)한, 심하게 말하면 속칭 ‘변태’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내용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 하고, 행복은 ‘아타락시아’, 즉 쾌락한 상태에 있을 때 얻을 수 있으며, 쾌락이란 ‘육체적 고통이 없고(快) 정신이 평온한(樂) 심신의 안정 상태’를 말한다.
 
세계보건기구 헌장이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한 안녕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2,300년 전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현대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에피쿠로스는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임을 설파한 것이다. 이와 같이 ‘건강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를, 일본인들은 이상한 직역(直譯)으로 변태적 느낌의 ‘쾌락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였기에 인간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도 했다: ‘어떤 육체적 질병의 발생은 이와 유사한 질병을 예방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여서 항원항체 반응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가볍게) 어떤 질병을 앓은 경우 동일 또는 유사 질병에 대한 예방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인도, 중동, 중국의 문헌에 산발적으로 인두종법(人痘種法)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 원리를 탐구하여 유의미한 의학적 결론을 도출한 것은 후대 유럽인들이었다. 영국의 제너, 프랑스의 파스퇴르 등은 근대적 의미의 ‘예방의학’을 창시했고, 이후 많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현대에는 예방접종의 의학적 효능은 (‘안아키’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을 받은 후 사망한 사례가 잇따라 신고되고 있다. 같은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사망한 사례는 10년 전인 2009년에 단 1건밖에 없었는데(65세 여성이 예방접종 후 밀러 피셔 증후군(길랭 바레 증후군의 아형)으로 흡인성 폐렴이 발생하여 사망), 올해에는 예방접종 후 사망한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질병관리청이 분석한 2020-2021절기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현황에 따르면 10월 31일 0시 기준으로 예방접종 후 신고된 이상반응은 총 1,669건으로, 이는 총 접종건수 1,708만 건 중 0.009%에 해당한다. 이 중 예방접종과 인과관계가 밝혀진 사례는 아직 없다.
 
이상반응 중 사망 신고 사례는 총 83건으로, 총 접종건수의 0.00048%이다. 예방접종 후 사망까지의 경과시간은 48시간 이상이 50건(60.2%)이었고, 24시간 미만은 13건(15.7%)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망 신고 사례 83건 중 40건에 대해 부검을 시행했고, 33건은 시행하지 않았으며, 10건은 시행 여부 결정 절차 중에 있다. 33건에 대해 시행하지 않은 이유는 보호자가 거부하거나 명확한 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검 또는 기초조사, 역학조사를 거친 결과 72건은 대동맥 박리, 급성심근경색증, 뇌출혈 등 예방접종과 무관한 명백한 사인이 밝혀지는 등으로 사망과 예방접종 간의 인과관계가 ‘매우 낮음’으로 판단되었다. 최근 신고된 11건은 조사 중이다.
 
올해의 이러한 예방접종 부작용 의심 사례들에 대하여, 일부 정치권은 ‘예방접종을 전면 중단하고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전문가단체인 의협 역시 ‘1주일간 접종 잠정유보’를 권고했다가 1주일 뒤 다시 ‘접종 재개’를 권고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에 대한 원인 분석은 의료계의 몫이지만, 이런 사례들로 인해 발생한 분쟁의 해결은 법조계의 몫이다. 법원은 이러한 ‘예방접종 부작용 의심 사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리딩 케이스를 하나 살펴보자.
 
2013년 만 75세의 A는 보건소에서 ‘폐렴구균 예방접종’을 받았는데, 같은 날 저녁부터 좌측안면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이에 A는 국가에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예방접종 피해보상을 신청했는데, 국가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A는 이 거부처분을 취소하여 달라(=보상해 달라)고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제1심, 항소심을 거쳐 2019년 대법원은 ① 먼저 감염병예방법상 예방접종 피해에 대한 국가의 보상책임은 무과실책임이지만, 그 피해가 예방접종으로 발생하였다는 ‘인과관계’는 인정되어야 함을 명확히 하면서, ② 이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인과관계가 추단되면 증명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③ 인과관계의 추단은 1) 시간적 밀접성이 있고, 2) 의학이론상 피해발생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3) 피해 발생이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의 증명이 있으면 된다는 원칙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① A의 경우 이러한 정도의 증명에 이르지 못했고, ② 예방접종 후 면역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추측만으로 인과관계를 추단할 수는 없으며, ③ 특히 피해자가 해당 피해와 관련한 다른 위험인자(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를 보유하고 있다거나, 해당 예방접종이 오랜 기간 널리 시행되었음에도 해당 피해에 대한 보고 등이 없다면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수 있음을 들어, A의 청구를 기각했다. 즉 환자의 ‘막연한 추측’만으로 국가에게(=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지난 주 서울고등법원은 작년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을 받은 후 ‘길랭 바레 증후군’이 발생한 환자 B에 대해, 시간적 근접성 등을 들어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피해보상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국민들이 막연한 추측으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전문가인 필자가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로 오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때 국민들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그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은, 에피쿠로스를 ‘건강주의자’로 바로잡아주는 것은 전문가인 의사들과 의사단체의 역할이다. 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요즈음, 의사들과 의사단체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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