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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망치와 쇠망치
뿅망치와 쇠망치
  • 전성훈
  • 승인 2020.10.27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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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98)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인류는 35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 그 유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원숭사람)이다. 이후 여러 원시인류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는 아프리카의 주인이 되었다. 이후 인구가 크게 늘어나자 호모 에렉투스는 인구압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175만 년 전 시나이 반도를 거쳐 최초로 아프리카 바깥으로 나선다. 인류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170만 년 전에는 중동, 150만 년 전에는 인도와 유럽, 100만 년 전에는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호모 에렉투스는 계속하여 ‘세상 끝까지’ 퍼져나갔고, 이후 10만 년경에는 지구상 모든 지역에 퍼져 살게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지구를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7만 5,000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과 함께 빙하기가 닥쳤다. 이 때 전지구에 퍼져있었던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들은 ‘전멸’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여 살고 있던 후발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수는 불과 2,000명에 불과했다.
 
빙하기가 지나가자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아프리카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빙하기에 겨우 살아남았던 소수의 인류아종들(네안데르탈인 등)을 모두 먹어버리고(진짜로 잡아먹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시 한 번 지구를 점령했다. 현재의 75억 명의 인류는 모두 이 2,000명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다.
 
이때까지 인류는 법이나 도덕이니 권력이니 하는 머리 아픈 것들을 모르고 살았다. 자연에서 살아남기도 급급했던 데다가, 인구가 적었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삐딱하게’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이르자 인류는 단위면적당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농경을 시작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농경이 가능한 좁은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자 질서 유지를 위해 ‘삐딱한’ 자들의 처리가 당면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폭력에 기반하여 ‘권력’이 탄생했고, 그 폭력을 인체에 가하는 ‘형벌’이 탄생했다.
 
형벌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첫째 모든 사안을 형벌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과, 둘째 사회적으로 전문적 판단과 기능이 필요한 영역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도무지 형벌이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가령 농경을 위해 천문의 움직임을 살펴야 하는 천문관을 형벌로 위협한다 해도, 갑자기 모르던 것을 알게 되거나 더 정확하게 알아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천문관을 형벌에 처하는 것이 (권력자의 면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동체에 이익이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경미한 사안은 ‘비난’으로 대체하여 ‘도덕’이라는 영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문적 영역은 형벌로 위협하기보다는 그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도록 지식과 경험을 도제식으로 전수하거나 자식이 세습하도록 강제/장려했다. 이른바 ‘전문가’의 탄생이다.
 
전문가와 전문가집단은 이렇게 사회적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이후 수천 년간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전문가의 판단은 점점 정확해 졌고, 사람들은 그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심지어 권력자조차도, 전문가의 판단을 점차 신뢰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hard power’인 권력과는 구분되는 ‘soft power’인 전문가의 ‘권위’가 탄생했다.
 
전통적 의미의 권력은 17, 18세기의 시민혁명, 20세기의 민주주의혁명을 거치면서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완전히 해체되었다. ‘권위’는 어떤가? 21세기 들어 기술의 혁신적 발달로 온라인에 ‘지식의 대집적’이 일어나고 모든 시민들이 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되자,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비밀리에 전해 왔던 전문적 지식을 더 이상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과거 수천 년간 권력에 접근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던 감추고 싶은 역사 덕분에, 전문가와 권위주의는 시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탈권위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부작용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빨리빨리’의 민족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탈권위주의는 흐름이 아닌 ‘급류’이다. 권력과 권위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권위는 권력과 똑같이 손가락질 받으면서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
 
그러나 탈권위와 무권위는 다르다. 공동체 전체를 ‘사회’, 그에 속한 부분을 ‘분야’라고 하면, 사회의 어느 ‘분야’나 분쟁과 어려움은 항상 발생하기 마련이고, 전체 ‘사회’의 유지를 위해 이는 해결되어야 한다. ‘분야’의 극심한 혼란이 ‘사회’에 영향을 주어 사회 자체가 붕괴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의 분쟁과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전문가/전문가집단을 두어 그의 판단에 따라 분쟁과 어려움을 해결해 왔다. 전문가의 판단이 완벽하고 오류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는 각 ‘분야’가 내린 판단을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고, 각 ‘분야’는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그래도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집단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최선임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가주의와 권위주의는 본질적으로 그 나름의 문제점, 폐쇄성과 무오류주의라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본 것과 같이 지식이 집적되고 네트워크화되면서 사회는 일종의 집단지성을 탄생시켰고, 이러한 집단지성은 이러한 단점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과 검찰청 앞에 판결 등에 불복하는 내용의 불법 현수막이 게시되고, 최선의 진료를 제공한 의사를 고소하고 의료기관 앞에서 1인시위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된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탈권위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급류’를 한 번 고민해 볼 때가 되었다. 대표적 전문영역인 의료계와 법조계에서조차 ‘권위’는 절대악인가? 각 분야에서 전문가는 책임지지 않는 보충적인 조언자가 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전문가로서의 책임과 권위를 유지하되 ‘견제와 균형’을 찾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옳은가?

그 내용상 당연히 전문가단체의 의견을 경청해야 할 사안임에도, 전문가단체가 ‘권위적으로 보이는’ 입바른 소리를 하여 불편하기 때문인지, 정부가 전문가단체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듣는 시늉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탈권위가 과하여 전문가에게 뿅망치를 쥐여 주거나, 무권위를 열망하기 때문인지 비전문가에게 쇠망치를 쥐여 주는 내용의 제도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내는 세태를, 탈권위에 편승하여 무권위의 위험성을 고민하지 않는 세태를 깊이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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