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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면허, 성범죄
의사, 면허, 성범죄
  • 전성훈
  • 승인 2020.09.29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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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96)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면허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는 ‘보통 사람에게는 허가되지 않는 특수한 행위를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가하는 행정처분’이다. 그러면 의사 면허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비의사에게는 허가되지 않는 의료행위를 의사에게만 허가하는 행정처분’이다.

의사 면허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그 사회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당사자는 이를 얻기 위해 10여 년간 피땀 흘려 노력한다. 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의 몸을, 오로지 이것만을 믿고 의사에게 맡긴다. 그리고 정부는 국가가 관리하고 있는 수많은 면허나 자격 중 이를 가장 중요하게 관리한다.

이렇게 사회적 의미가 크기에, 의사 면허의 부여나 제한은 법령에 의해 매우 신중하게 이뤄진다. 이렇게 의사 면허의 부여나 제한을 법령에서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의료행위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예를 들어 중장비운전면허나 공인중개사자격과는 달리) 의사 면허의 부여나 제한에 대하여는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다. 특히 대중의 호기심과 맞닿아 있는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특히 대중의 막연한 공포와 맞닿아 있는 의사의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국민적 관심이 더욱 그러하다.

최근 술에 만취해 길에 앉아있던 20대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20대 의사에 대해 법원은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와 관련하여 의사 면허 취소 사유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의사가 성폭행 범죄를 저질러도 의사면허가 유지되는 현행 의료법을 개정해 달라’는 청원이 제출되었는데, 현재까지 35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고 한다.

위 사건은 어떤 점에서는 전형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판결이다. 의사 A는 작년 여름 새벽에 귀가하던 중, 술에 만취하여 길에 앉아 있던 여성 B를 보았다. A는 B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고, 10여 분 정도 대화하다가 함께 택시를 타고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모텔로 가서 투숙한 뒤, 객실에서 관계를 가졌다. 여기까지는 증거와 증언에 의해 확인된다. 그런데 B는 다음날 ‘자신은 만취상태였고, 성관계에 합의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A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A는 수사단계부터 제1심까지 강력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A는 ‘직업이 의사라서 걱정이 앞서 다가가서 얘기한 것이고, 얘기하던 중 성관계에 합의한 것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1심 재판부는 ‘만취한 피해자가 피고인 인적사항도 모르는 상황에서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건 정상적인 의사결정이라 볼 수 없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몇 마디 말을 나눴다는 핑계로 피해자 상태를 이용해 범행하고, 이를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고 하면서 A에 대하여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했다.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어 양복 대신 카키색 죄수복을 입고 구치소에 갇히자, A는 ‘멘붕’에 빠졌다. A는 항소심에서는 입장을 바꾸어 죄를 인정했다. 이에 더해 A는 (제1심에서 합의서를 제출했지만) 항소심에서 추가로 B와 합의하고 합의서를 추가 제출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와의 합의사실은 제1심에서 이미 반영되었으므로, 감형 사유는 되지 않는다’며 제1심의 형량을 유지했다. 즉 집행유예를 선고하여 A를 풀어주지 않은 것이다. 이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의사 A는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어떤 점에서 전형적인가? 첫째 준강간 당시 피해자가 만취상태였음이 확인되고,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굳이 신빙성을 의심할 다른 증거가 없다면, 이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최근의 판결 경향과 일치한다. 둘째 성범죄에서 섣불리 무죄를 주장하다가 유죄로 판단되는 경우 실형이 선고되는 경향과도 일치한다. 셋째 피해자와 합의하여 합의서를 제출했다 하더라도,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집행유예를 선고하지 않는 경향과도 일치한다.

반면 어떤 점에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준강간의 핵심요건인 ‘피해자의 심신상실 상태’를 엄격하게 해석했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범행 당시 어느 정도는 의식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면, 즉 이 사건과 같이 ‘피해자와 피고인이 10여 분간 대화한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폭넓게 해석하여, 이 사건과 같이 ‘설사 피고인의 모텔에 가자는 말에 피해자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정상적인 의사결정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심신상실 상태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오고 있다. 적어도 성범죄에 관하여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완화하는 추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곱씹어 볼 점은, 제1심 재판부가 ‘의사인 피고인이 했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의사 자격 이전에 필요한 것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공감능력이다’라며 ‘의사’ A를 이례적으로 꾸짖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이는 ‘직업이 의사라서 걱정이 앞서 다가가서 얘기한 것이다’라는 A의 항변을 재판부가 가차 없이 반박한 것이고,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말라는 면박이기도 하다. 비록 한 사건의 양형이유에 불과하지만, 이는 최근 법원이 피고인인 의사를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로 보인다.

현행 의료법에서 2000년에 개정된 내용, 즉 의사가 ‘의료 관련 법령’ 위반으로 처벌받은 경우에만 의사 면허 취소가 가능하도록 규정한 조항은 끊임없이 여론의 개정 압력을 받고 있다. 다른 직역들에 비하면 의사에게 유리한 것은 맞다. 다만 의사들은 다른 직역들보다 훨씬 많은 법적·행정적 의무를 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소소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약 의료계가 이 ‘보상’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여론의 관리는 필수이고, 따라서 일탈행위를 한 의사에 대한 강력한 자체징계는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의협이 (법령을 개정하여) 의사에 대한 형사 사건 결과를 법무부로부터 통보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중앙윤리위원회에서 심의하여 의사 면허의 제한에 대한 의견을 보건복지부장관 처분 전에 ‘먼저’ 제출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자체징계를 적절히 활용하여 여론과 주무부처를 적절히 ‘관리’하고 있는 변협의 예를 참고해야 한다.

제 살을 도려내는 것은 당연히 아프지만, 썩은 살은 도려내야 한다. 앞서 본 법원과 국민의 태도를 고려할 때, 그것이 전체 의사의 면허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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