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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 위기 몰린 독감 무료백신···‘어부지리’가 독이 됐나
폐기 위기 몰린 독감 무료백신···‘어부지리’가 독이 됐나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0.09.23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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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주업체들 검찰 조사로 입찰 못해, 백신 조달 경험 없는 신성약품이 최초 수주
관행가의 절반 미만인 정부접종가가 사고 원인?···신성약품 “낮은 가격 때문 아냐" 항변

정부의 독감 백신 무료 접종사업이 유통업체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 일시 중단되면서 그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에 처음 국가 백신사업을 수주한 업체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정부가 ‘납품가 후려치기’에만 치중하며 질 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은 게 구조적인 원인이란 분석도 나온다.

앞서 정부는 지난 22일부터 13~18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독감 백신 무료 접종사업을 시작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냉장상태로 유통돼야 하는 독감 백신 중 일부가 운송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돼 버리는 사고가 발생해 시행을 하루 앞두고 접종사업을 전격 중단했다.

백신의 운송 과정에서 상온 노출 사고를 일으킨 유통업체는 ‘신성약품’으로 확인됐다. 신성약품은 백신을 냉동차에서 냉장차로 옮기는 배분 작업을 야외에서 진행하면서 차문을 열어 두거나 백신을 판자 위에 일정 시간 방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번 사태 직후 일선 개원가에서는 신성약품이 운송한 백신이 아이스박스나 아이스팩이 아닌 종이상자에 달랑 담긴 채 도착했고, 수령인이나 수령일자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배송됐다는 등의 업체의 관리 부실이 의심되는 의혹이 다수 제기되기도 했다.

◆국가 백신사업 처음 수주한 신성약품 , 경험부족이 원인?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이 무엇보다 신성약품의 ‘경험 부족’에 있다는 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신성약품은 전국적인 배송 경험이 부족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정부와 조달 계약을 따냈다. 이전에 지난 2년간 백신 조달 사업에 참여한 업체는 우인메디텍(2018년), 정동코퍼레이션(2019년) 등이다.

백신 조달 경험이 없는 신성약품이 올해 처음으로 정부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백신 조달을 맡았던 업체들이 ‘입찰담합 및 방해’로 검찰 조사를 받은 이유로 백신 제조사로부터 백신 공급 확약서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실제로 우인메디텍 등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에 대해 백신 제조사들이 부담을 느껴 공급확약서를 써주지 않는 바람에 우인메디텍은 올해 입찰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유력업체들이 입찰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상황에서 신성약품이 일종의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게 된 셈이다.

국민의힘 강기윤 의원에 따르면 질병관리청(당시 질병관리본부)이 5차까지 독감 백신 구매 입찰공고를 한 후 지난 8월 31일 개찰한 결과, 신성약품은 2순위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입찰에는 총 11개 업체가 참여했고 1순위 업체와 예정가격을 초과한 2개 업체를 제외한 8개 업체의 투찰금액은 모두 동일해 같은 2순위였다. 하지만 신성약품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5개 이상 백신제조업체의 공급확약서를 기한 내 제출하지 않아 적격성 심사에서 탈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성약품이 이번에 정부의 독감 백신사업을 따낸 것은 처음이지만 신성약품 자체는 업계에서 업력을 쌓아온 중견업체라는 평가다. 지난 1985년에 설립된 이 업체는 2019년 기준 사원 수 115명, 매출액 4226억 7704만 원에 달한다. 업계 1위인 지오영, 백제약품, 줄릭파마 정도는 아니지만 매출액 10위권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중견업체로 분류된다.

신성약품은 국내 다수의 제약회사 및 대형병원과도 의약품 공급 거래를 하고 있고, 현대화된 대규모 물류센터까지 구비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정부 독감백신사업 조달 입찰을 따내면서 백신 유통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콜드 체인(cold chain)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자체적으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시켜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나치게 낮은 정부납품가 등도 사고 원인으로 지적

이번 사태의 원인이 정부가 무료독감 접종사업을 실시하면서 접종가를 지나치게 낮은 가격으로 책정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로 인해 경쟁력 있는 업체들이 굳이 입찰을 따내려고 하지 않았고, 막상 계약을 따내고도 유통비용을 줄이기 위해 관리를 부실하게 하는 바람에 이와 같은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신의 정부납품가는 8790원이지만, 일선 의료기관의 관행 접종가는 최소 2만 원 선에서 최대 6만 원 선으로 형성돼 있어 양측의 갭 차이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기존의 관행대로 낮은 정부 납품가에 맞추려다 보니 비용 부담 등으로 인해 하청업체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여기에 경험 부족까지 더해지면서 ‘종이박스 배송’ 같은 최악의 사태로 이어졌기 때문에 결국 이번 사태는 일찍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신성약품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종이박스 배송 때문은 아니라고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문 신성약품 회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포장하면 냉매가 녹아 오히려 변질될 가능성이 있고, 대신 종이박스로 운송하면 온도 유지와 측정에 더 유리하다”고 말했다.

‘접종가 후려치기’ 논란에 대해서도 “정부가 입찰자에게 3%(36만 도스)의 재고 물량 보유를 의무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수익률이 썩 좋은 사업은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가격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낮은 가격이라도 유통 효율화와 대량 판매로 수익을 내는 것이 경영자들이 할 일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시장성을 보고 정부 입찰에 응했다”고 말했다.

신성약품 측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이다. 김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며 “우선 문제를 일으킨 물류회사를 교체하고 국민의 건강을 위해 백신 공급부터 빠르게 정상화하겠다. 특히, 우리가 콜드 체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질병관리청의 처분이 나오면 달게 받고 뉘우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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