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그리고 무죄추정원칙
이춘재, 그리고 무죄추정원칙
  • 전성훈
  • 승인 2020.09.15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94)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얼마 전 어떤 의사분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 의사분은 필자가 기고하고 있는 이 칼럼을 매주 읽으신다고 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술이 여러 순배 돌고, 모두 꽤나 취했을 때, 그 의사분은 이런 말씀을 했다.
 
‘그런데 변호사님은 범죄자한테 좀 우호적이신 것 같아요.’
  ‘제가요? 별로 안 그런데.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그, 무죄추정원칙? 그걸 유독 강조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저 나쁜 놈들 싫어합니다, 허허’

취중에 농반진반으로 나온 질문이었기에, 그냥 이 정도의 답변으로 마무리되었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 칼럼에서 ‘무죄추정원칙’을 강조하는 글을 두세 번 썼던 것 같다.

왜 무죄추정원칙을 중시하느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개인적 가치관에 관한 긴 이야기를 쓰기보다, 이해가 쉬운 사건을 하나 예로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즉 이춘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5년도 안 되는 기간에 14세부터 71세까지 10명의 여성이 강간살해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평범한 시민들이었던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피해자 이외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용의자들’이다.

첫 범죄가 발생한 후 3개월 사이에 같은 범행방법으로 4명이 살해되었는데도, 당시 경찰은 ‘태평성대’라는 정권의 선전에 누가 될까 그랬는지,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기초적 인식이 이러했으니, 사건 현장을 후딱 수사하고 태워버리는 등(!) 경찰의 초동 수사는 엉망이었다. 게다가 과학수사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 경찰은 기껏 범행 현장 근처에 사는 남자들 중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잡아다 족치는 방식의 재래식 수사밖에 할 수 없었다. 6차 사건에 이르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대통령은 반드시 범인을 잡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찰은 그 때부터 그야말로 ‘쥐 잡듯이’ 용의자들을 연행하여 강압적으로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고문기술자인 이근안 경감을 투입했다는 것만 봐도 당시 경찰의 다급함과 상황인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수사받은 사람은 무려 3,000여 명.

30년이 흐른 지금, 이춘재의 자백으로 결국 이 3,000명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수사기관은 용의자들을 어떻게 수사했을까?

2차, 7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은 박 모 씨(당시 29세)는 1991년 피의자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 때 경찰은 경목(경찰청 소속 목사) 앞에서 박 씨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기 위해 자백을 했다’고 하는 모습의 동영상까지 TV에 공개했고, 사람들은 모두 범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변호인이 선임되어 접견해 보니, 박 씨는 동영상에 나온 자백 내용을 마치 성경 암송하듯이 줄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변호인은 듣자마자 ‘이건 외운 거다’라고 판단했고, 박 씨를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범행 발생일 1주일 전에 박 씨의 아내는 첫 아이를 낳았는데, 이것은 수사관은 모르고 변호인만 알고 있었다. 변호인이 ‘아들 태어난 게 그 일 전인가요? 후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박 씨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변호인이 날짜를 말해 주자, 박 씨는 ‘아, 전이네요’라고 말했다. 즉 수사관은 아이가 태어난 것을 몰랐기 때문에, 박 씨에게 암기시킨 내용에 아들 얘기는 없었던 것이다.
 
변호인은 ‘태어난 아들을 위해서 진실을 말해 달라’라고 박 씨를 설득했다. 박 씨는 자백을 번복했고, 결국 불기소되고 풀려났다.
 
4차 사건, 5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은 김종경 씨(당시 41세)는 1992년 피의자로 몰려 6개월간 수사받고 ‘자백’까지 했다가, 같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은 후 자백을 번복했고, 역시 불기소되고 풀려났다.
 
김종경 씨 사건은 황당하고, 가슴 아프고, 기가 막힌 사건이다. 황당한 점은, 사건의 시작이 미국에 사는 자칭 ‘영능력자’ 김 모 씨라는 사람이 ‘꿈속에서 김종경이라는 사람이 진범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 후 한국에 와서 김종경 씨 집 근처에 방을 얻어 몰래 스토킹하면서 자기 나름의 증거를 모았고, 이를 근거로 경찰이 김종경 씨를 연행해 갔다는 점이다.
 
가슴 아픈 점은, 혐의가 없다고 석방되었음에도 강압수사의 트라우마로 인해 김종경 씨는 1년 뒤 자살을 시도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변호인이 그를 위해 국가에 강압수사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승소했지만, 결국 그는 자살했다는 점이다.
 
기가 막힌 점은, 김종경 씨가 자살한지 10여년 후 김종경 씨를 범인으로 몰아간 ‘영능력자’ 김 씨가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 ‘김종경이 진범이다.’ ‘가족들이 김종경이 진범인 것을 알고 독살했다.’ ‘자살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이를 알게 된 부인과 아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민형사소송을 제기하여 민사소송에서 승소했고, 유죄 판결도 받아냈다. 하지만 김 씨가 미국에 살고 있어서 강제집행이나 처벌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부인과 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9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차례 조사받았던 차 모 씨(당시 38세)는 달리는 열차 앞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10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차례 조사받았던 장 모 씨(당시 32세)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자살했다. 8차 사건의 범인이라고 지목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을 복역한 윤성여 씨는, 이춘재의 자백 이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위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조그만 회사에 다니거나 무직자였던, 범행현장 근처에 살았을 뿐인 그 시대의 전형적인 서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범인을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경찰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되기 쉬웠고, 수사를 받을 때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상상도 못할 고초를 겪었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기도 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지만 어떤 것은 비교적 늦게 변하기도 한다. 필자는 자살한 김종경 씨와 그 가족의 억울함과 고통을, 일부이겠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가 무죄추정원칙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