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8:07 (화)
환자가 죽으면 다 의사 책임?
환자가 죽으면 다 의사 책임?
  • 전성훈
  • 승인 2020.08.25 0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91)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가장 오래된 직업은 무엇일까? 아무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이기는 하다. 그 중 농부, 의사, 창녀를 꼽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 같다. 셋 모두 인간의 생존과 본능에 직접 연관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료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수만 년 전 석기시대 유골 중에서도 외과적으로 천공된 두개골이 발견된다.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전문적인 봉합 수술이 이뤄지고 있었다. 질병의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은 이미 2천 년 이전부터 서양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전서’, 동양에서는 ‘황제내경’ 등으로 집대성되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의료는 발전하고 변화해 왔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그것은 ‘최선을 다했지만 치료에 실패한 의사를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하다. 의학적 지식이 축적될수록 인체가 너무나 복합적인 유기체임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근대 계약법 정립시 진료계약을 위임계약으로 정의함으로써, 의사의 의무가 결과채무가 아닌 수단채무임을 명시함에 이르렀다.

  물론 의사가 ‘고의범’이라면 당연히 이런 면책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고의범이 아니라 하더라도, 위임계약의 본질상 의사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라면 의료과실이 문제될 수 있다. 어느 정도가 ‘최선’인지, 즉 의료과실의 성립 기준에 대해 법원은 간명한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동시대의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의사가 진료시에 기울이는 주의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과실이 있다’는 것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공통점은 환자 사망 사고라는 점, 그러나 의사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사례의 의사 A는 대학병원 소아외과 전문의였다. A는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5세 여아 B를 상대로 계속적인 항암치료를 하기 위해, 전신마취를 하고 카데터 및 케모포트를 B의 우측 쇄골하 중심정맥 및 우측 흉부에 삽입하는 수술을 시도했다.

  그런데 A는 주사바늘로 B의 우측 쇄골하 중심정맥을 찾는 과정에서 이를 정확히 찾지 못해 1시간 30분 동안 B의 우측 쇄골하 부위를 10여 차례 찔렀고, 그러던 중 주사바늘로 B의 우측 쇄골하 혈관과 흉막을 관통해 혈흉을 발생시켰다.

  의료진은 이를 곧 발견하고 응급조치 및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으나, B는 ‘우측 쇄골하 혈관 및 흉막 관통상에 기인한 외상성 혈흉으로 인한 순환혈액량 감소성 쇼크’로 당일에 사망했다. 검사는 A가 무리하게 삽입 수술을 진행한 것으로 보고 업무상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이에 대해 항소심은 ‘백혈병으로 인해 간, 비장 등의 장기가 비대해져 중심정맥 위치가 이동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음에도, A는 카데터 등의 삽입 필요성에만 치중하여 다소 무리하게 삽입 수술을 시도했다’고 보고 A의 업무상과실을 인정하여 A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① B에 대한 지속적인 항암치료를 위해서는 피하혈관 확보를 위한 삽입 수술이 반드시 필요했던 점, ② 당시 B의 전신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간수치가 높아 수술 중단 후 다시 전신마취해 수술을 시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A가 삽입 수술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중심정맥을 찾기 위해 계속하여 주사바늘로 찌른 것이 진료방법 선택에 있어서 의사의 합리적 재량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A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둘째 사례의 의사 D는 대학병원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D는 30대 중반의 초산모인 E가 같은 병원에서 제왕절개술을 받은 이후 폐색전증을 예견할 수 있는 증상을 호소하였음에도 이에 필요한 치료를 하지 않아 E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되었다.

  제1심과 제2심은 모두 ① E가 5년 전 혈전치료를 받은 병력이 있고 수술 후 수시로 호흡곤란을 호소하였으므로 D로서는 폐색전증의 위험을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 ② 폐색전증은 분만 전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이고 발생시 치명적이라는 점, ③ 제왕절개술 후 실시한 동맥혈가스분석검사 및 흉부X레이검사 결과와 E의 저혈압, 빈맥, 발열 등의 증세가 모두 폐색전증을 의심할 정도였다는 점 등을 들어, D는 E의 폐색전증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으므로 D의 업무상과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① 폐색전증은 비특이적인 증상 및 징후를 보일 수 있고, 유사한 증상과 징후를 보이는 질환이 흔하며, E가 호소한 호흡곤란·현기증 등은 수술 후 나타날 수 있는 흔한 증상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점, ② 심전도검사·흉부X레이검사·동맥혈가스분석검사 등으로는 폐색전증을 확진하기 어렵고, 폐혈관조영술을 실시하면 폐색전증을 확진할 수 있지만 이는 침습적 검사로서 그 자체로 색전 유발 가능성이 있는 점, ③ 전체 임산부 중 폐색전증의 발생 가능성 자체는 극히 낮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제왕절개술로 출산한 30대 중반의 산모에게 발열·호흡곤란·현기중 등과 같이 비특이적인 증상·징후가 나타났다고 하여 담당의사가 폐색전증을 예견하지 못한 것에 어떠한 잘못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A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즉 대법원은 ‘의사가 낮은 발생 가능성을 가진 위험을 모두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여 이것만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앞서 본 ‘최선을 다했지만 치료에 실패한 의사를 벌하지 않는다’는 태도에 따른 판결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의사의 진료상 과실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는 경우가 거의 없다. 또한 미국에서 2000년까지 의사에 대한 형사처벌은 대부분 음주진료에 따른 환자 사망의 경우였고, 그 이후로 최근까지는 진료의 결과가 아니라 절차적 문제 또는 악의적 행동(환자로부터의 금품수수, 환자와의 성관계 등)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단지 진료상 과실 때문에 처벌받기도 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의사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얘기일 것이다.

  큰 잘못이 없는 차량운전자는 적어도 형사적으로는 면책함이 타당하다는 인식하에, 1982년부터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 시행되고 있다. 안심하고 차량이 교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심하고 의사가 진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의사가 안심하고 진료할 수 있어야 국민이 더 안전해 질 수 있다. 이번 국회에서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기를 희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