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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채가 밝힌 강간치상 사건
골프채가 밝힌 강간치상 사건
  • 전성훈
  • 승인 2020.08.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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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89)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이 얼마나 간결한 문장인가.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은, 사법절차에서 일종의 ‘검투사’로서 살아가는 변호사들에게도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전체 형사 사건 중 무죄 선고 사건은 1%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의 커리어를 통틀어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무죄’가 아니라 ‘유죄 아님’이 맞다. 미국 법정영화에서 변호인은 ‘He is innocent.’라고 변호하지만, 판사는 ‘Not guilty.’라고 판결하는 것을 보면 차이를 알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실무상 큰 차이가 있다.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반박하는 것이 용이한 것처럼, 무죄를 증명하는 것보다 유죄의 증거가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변호인들은 ‘검사 제출의 ○○○○ 증거는 ◇◇◇◇와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유죄의 증거로 불충분하다’라는 주장을 자주 펼친다. 형사 재판에서 변호인의 목적은 판사가 피고인측 주장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검사 주장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검사 주장을 믿지 못하게 만들면 무죄가 쉽게 나올 것 같은데, 실무는 그렇지 않다. 헌법상 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과 달리 실무상으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판사들은 검사가 기소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유죄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피고인이 ‘피를 토하는 억울함’을 표현하거나 변호인이 ‘정말 설득적인 변호’를 펼치지 않으면, 한 달에 수십에서 수백 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판사들은 (표정은 진지하지만, 속으로는) 심드렁하게 ‘또 저 소리네’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과거 적폐를 청산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법조계에서는 성범죄 엄벌 기조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일부이기는 하지만 ‘진짜 억울한’ 성범죄 피고인들이 수사기관과 법원의 의심을 벗기가 쉽지 않다. 아래 사건도 그렇다(이는 모 변호사님이 서울지방변호사회보에 소개한 실제 사건이다).
  A남은 B녀와 교제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B가 A에게 헤어지자고 하자 다툼이 생겼다. 다툼이 심해지자 B는 ‘A가 이별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억지로 A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겁을 주어 못 나가게 했다. 겁을 주려고 A는 자신을 사무실 창문이 있는 벽 바로 앞에 세워두고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그때 자신은 골프채를 피하려다 허리를 삐끗하여 상해를 입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골프채 헤드가 자신이 서 있던 벽의 반대편 벽면에 부딪히면서 그 벽면에 골프채 헤드자국이 생겼다. 그리고 A는 이전에 자신이 거부했음에도 강제로 성관계 했다’고 주장하면서 A를 고소했다. 그러면서 B는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① 벽면에 생긴 골프채 헤드자국, ② 허리를 삐끗한 B의 진단서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수사 끝에 A는 ‘강간치상죄 및 감금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사건을 맡게 된 C변호사 역시 구속되어 있는 A를 접견하기 전까지는 흔한 치정사건으로 생각하고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A는 처음 본 C변호사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피를 토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A는 ‘자신은 B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적이 전혀 없다. B가 주장하는 위치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면 반대편 벽면에 골프채가 닿을 수도 없다. 사무실 벽면의 골프채 헤드자국은 골프를 좋아하는 자신이 평소 사무실에서 한 손으로 스윙 연습을 하다가 실수로 벽을 쳐서 생긴 것인데, 평소 B가 자신의 사무실에 자주 놀러왔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처벌받게 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A는 ‘B가 허리를 삐끗한 사고는, 어떤 눈 오는 날 차 안에서 자신과 B가 말다툼을 하다가 B가 화를 내며 갑자기 차에서 내렸는데, 그 때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다친 것이다’라고 상황을 아주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런 A의 말이 거짓말로는 생각되지 않아 C변호사는 ‘이러한 점을 수사기관에서 설명하고 항변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A는 ‘당연히 전부 여러 번 얘기했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내 말을 묵살하고 전혀 믿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러한 A의 말을 듣고 C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면서 법원에 ‘현장검증’을 신청했다. 피고인측이 현장검증을 신청하는 사례가 드문데다가, 무엇보다도 판사가 현장에 직접 나가야 하므로 그러지 않아도 바쁜 판사에게 시간적 부담을 준다. 현장검증 신청은 기각되었다.
  보통은 이쯤 되면 변호인도 무죄 주장을 철회할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C변호사는 A의 눈물을 생각하면 도저히 유죄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C변호사는 이례적으로 직접 A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자체 현장검증’을 시행했다.
  확인해보니 A의 말 그대로 골프채를 휘둘렀다 하더라도 거리상 도저히 반대편 벽면에 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설령 닿았다 하더라도, 골프채로 사람을 치려고 했다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므로 벽면에 ‘∧’ 모양의 자국이 나야 하고, 스윙 연습시에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므로 ‘∨’ 모양의 자국이 나야 하는데, 반대편 벽면의 헤드자국은 ‘∨’ 모양이었다. 또한 A가 평소 자신이 스윙 연습하던 위치라고 말한 지점에 서서 스윙 연습을 해 보니, 골프채 헤드가 정확히 반대편 벽면의 헤드자국 위치에 닿았다. C변호사는 이러한 ‘자체 현장검증’을 모두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이에 더해, C변호사는 B가 허리상해를 원인으로 실손보험금을 청구한 점을 알아내어 보험회사에 사실조회를 신청했다. 보험회사는 B가 보험금을 청구하면서 사고원인으로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삐끗했다’라고 기재했다고 회신했다.
  결국 A는 강간치상 및 감금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위 사건은 변호인이 ‘정말 설득적인 변호’를 개진하여 피고인의 억울함을 밝혀낸 훌륭한 사례이지만, 만약 A가 수사절차에서부터 제대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여 아쉽기도 하다.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애매한 상황으로 느껴지면’ 바로 변호사의 조력을 받으실 것을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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