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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 번 주례의 공덕
천오백 번 주례의 공덕
  • 의사신문
  • 승인 2020.07.2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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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준 기서울대의대 명예교수
정준기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존경하는 권이혁 교수님이 12일 향년 97세에 노환으로 작고하셨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말에 경성제국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해 서울대학교가 설립되고 첫 해인 1947년에 졸업했다.

이 서울의대 1회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리더십과 상승작용을 해 그를 대한민국 의학계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우선 1956년 의과대학 조교수로 시작해 우리나라 예방의학과 보건학의 터전을 마련하고 의과대학장, 보건대학원장, 병원장, 총장으로 서울대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예방의학과 보건학 부문의 학술 업적을 인정받아 1967년에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고, 1981년에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 1986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인품과 뛰어난 행정 능력은 국정에서도 발휘되어 문교부장관, 보건사회부장관, 환경처장관으로 활약하고, 한국교원대 총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사장, 국제보건의료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많은 보직과 관직을 거쳐간 인물은 우리나라에서 더는 없을 것이다. 학내외적으로 탁월한 권 교수님의 업적과 영광을 평가할 능력이나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단지 선생님의 광대한 활동 중에서 내가 관계되었던 몇 가지 미미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면모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1971년 내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에 입학하니 선생님이 약관의 나이인 48세로 의과대 학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서울의대의 학풍을 쇄신하면서 한 단계 도약시키고 있던 선생님은 신입생에게 학문의 국제화 추세를 소개하면서 영어공부를 강조한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학생 시절 내내 학장으로 계시면서 미국의 China Medical Board(CMB) 자금으로 의학도서관을 신축했다. 선생님의 노력으로 중국으로 가야할 돈을 우리가 유치한 것이다. CMB 측의 matching fund 요구를 재미 의대 동창회의 모금으로 해결하고, 번듯하게 세워진 3층 건물의 열람식 도서관에서 우리 학생들은 방과 후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그 다음해 의사국사고시 시험에서 최호준 동기생이 탁월한 성적으로 전국 수석을 하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선생님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결혼식의 주례를 해 주신 것이다. 대학원 지도교수인 고창순 선생님께서 권이혁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하였다. 권 교수님은 쾌히 승낙하면서 스케줄 표에 300 번이 넘는 숫자를 적으면서 당신이 지금까지 맡아 한 주례 수라고 설명했다(나중에 총 1,500번 주례를 하셨다고 본인에게 들었다).

이미 경험이 많은 선생님이 순조롭게 결혼식을 주재한 것은 물론이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단지 17%의 신랑신부 만 결혼식에서 들은 주례사를 기억했단다. 그만큼 긴장하고 여러 일에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례사를 소상히 기억한다. 내 혼인 때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많은 의대 동창들의 결혼식을 주관해서, 비슷한 말씀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선생님의 주례사는 정형화된 틀이 있었다. 우선 의대 졸업생(당시 의대에 여학생은 5%이하이었음)인 신랑이 학구적일 뿐만 아니라, 취미생활이나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의 명예를 빛낸 인재로 소개한다. 예를 들면 ‘야구 동아리’에서 후보 선수였던 나는 뛰어난 실력으로 모교를 드높인 스타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결혼생활에서 지켜야할 두 가지를 부탁한다. ‘건강’과 ‘사랑’이다. ‘건강’에서는 신체적 건강도 있지만 정신적 건강과 사회적 건강도 중요하게 지켜야 한다(학생 강의록에 있는 내용임). ‘사랑’에서는 신약 성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외워서 들려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생략-

처음에는 다소 성의가 없어 보였으나 결혼식을 단 한 번 하니까 좋은 내용이면 사실 결혼식 마다 반복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다. 결혼식에 선생님은 주례로 나는 하객으로 함께(?) 참여하면서 선생님이 선행을 하고 계시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대개 결혼식은 주말의 황금 시간에 하니 선생님의 귀중한 여가 시간을 우리가 빼앗는 셈이었다. 일생 동안 1,500 번 주례를 하셨다니 30년을 매 주말에 한번씩 하신 셈이다. 따라서 휴가나 여행을 자유롭게 못할 터인데 공적인 자리에서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숙명적인 위치에 순응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선생님은 각종 행사에서 건배사도 주로 맡아 하셨다. 처음에는 그저 말을 잘 하는 분으로 생각했으나 실상은 엄청난 노력으로 준비한 작품이다. 내가 2009년 대한의학회에서 주관하는 임상의학상을 받은 때였다. 시상한 후 만찬 자리에서 당연히 선생님이 건배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0년 아래인 내 신상을 잘 알 리가 없었다. 은사이신 고창순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서 권 교수님을 미리 찾아 뵈었다. 인사와 합쳐 15분 가량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당일 만찬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내가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을 엮어 스토리를 만들어 나를 잘 아는 듯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것도 간간히 옛 이야기와 농담을 섞어 재미를 더 하면서! 나는 선생님이 30년이나 아래이면서, 또 가깝지도 않은 내 일에 성심껏 준비하시는 것을 보고 성공한 리더의 자세를 엿 볼 수 있었다.

사모님이 10여년 전에 돌아가셔서 외롭게 보내셨지만 선생님 특유의 건강과 유머는 여전했다. 재작년에 졸업 70주년을 맞아 7명 동창생이 학교를 공식 방문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와 동료들이 대부분 다 떠나 요즘은 장례식에 갈 기회가 없다”고 농담을 하셨단다! 이렇게 강건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믿기지가 않는다. 교수님이 결혼식에서 누누이 강조하신 ‘건강’과 ‘사랑’을 당신이 스스로 보여주신 삶이었다.


대한민국의 의료뿐 아니라 학술 과학 분야의 최고 원로로 역할을 훌륭하게 하고 떠나가신 인품을 기리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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