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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탈모(脫毛)
권위의 탈모(脫毛)
  • 의사신문
  • 승인 2020.06.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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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82)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탈모는 남자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남자들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운이 좋아 거의 신경쓰지 않는 남자, 발모(發毛)에 좋다는 갖은 방법을 동원하면서 처절히 분투하는 남자, 그리고 가족력을 확인한 후 이미 마음을 비운 남자 등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남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최대한 늦추는 것’이다.

그래서 탈모의 신내림을 받을 사람인지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30대 후반 남자 후배들을 만나면 탈모 이슈는 항상 화제이다. 검은콩, 두피마사지, 식초로 머리감기 등 그 레퍼런스를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아이디어들이 공유되고, 최종적으로 ‘난 무슨 약 먹는다’로 정보교환의 대미를 장식한다.

필자는 부모님 덕분에 감사하게도 탈모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머리를 감고 보니 그 날 따라 머리가 꽤 많이 빠진 것 같았다. 마침 그날 저녁에 친한 후배와 약속이 있었는데, 이 후배는 ‘이미 마음을 비운’ 남자였다. 그래서 자타칭 탈모 박사였던 이 후배를 만났을 때 ‘조변, 나 머리 좀 빠진 것 같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런데 염장질에다가 우문(愚問)인 선배의 이 질문에 이 후배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형, 탈모는 두 시기가 있는데, 그냥 빠지는 때하고 폭풍같이 빠지는 때가 있어요. 그냥 빠질 때 투덜거리지 말고, 폭풍같이 빠질 때를 늦추기 위해 노력하세요.’

후배의 현답(賢答)을 듣고 나서 필자는 머리속에 종이 울리는 것 같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가늘디가는 머리카락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사가 대부분 같지 않은가?
어떤 것이든지 ‘좋은 때’라는 것이 있고, 그 때 이후로는 ‘그냥 나빠지는 때’와 ‘폭풍같이 나빠지는 때’ 두 가지밖에 없다. 머리카락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경기(景氣)도 그렇고, 의료계의 이복형제쯤 되는 법조계도 그렇다.

서울 소재 종합대학교를 가지고 있는 60대 학교재단 이사장이 30대 검사에게 조사받다가 ‘따귀’를 맞고 돌아와서 ‘우리도 법대 신설해서 법조인 만들어!’라고 분노에 찬 지시를 했다는 이야기는 법조계에서도 ‘신화’로 치부된다. 그리고 판사 생활 마치고 개업한 변호사가 1년 동안 30억 원을 벌었다는 소문에 ‘그 분 참 소박한 분이네’라는 평이 돌았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회자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인 변호사들 중 가장 수가 많은 소득구간이 200만 원 ~ 300만 원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까지 나올 만큼, 법조계도 많이 나빠져 있다. 특징이라면 비교적 오랜 기간 ‘그냥’ 나빠지다가, 변호사계가 같은 법조인 중 법원과 검찰이라는 우군을 잃은 순간 정치적 타협을 통해 법학전문대학원제도가 도입된 이후 변호사수 폭증으로 ‘폭풍같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가 매년 3,000명 전후로 배출되다가, 갑자기 7,500명이 배출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며칠 전 대한병원협회(병협)는 최근 정부가 재추진 중인 비대면진료제도 도입에 대하여 ‘원칙적 찬성’ 입장을 밝혔다. 물론 ‘3대 전제조건’ 및 ‘5대 고려사항’을 강조한 점에서 말 그대로 ‘원칙적’ 찬성이지만, ‘원격의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 의료단체 중 최초의 찬성이라는 점에서, 병협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의료계 내부 논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다른 대부분의 의료단체들은 반대 입장이며, 그 중 의료단체의 맏형인 의협의 입장은 더욱 강경하여 ‘독단적’ 원격의료 찬성 입장을 발표한 병협을 규탄하면서 ‘정부가 의료계의 동의 없이 일부 대형병원과 대기업의 이익만을 위해 원격의료를 추진하는 경우 강력히 저항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전한 내부 논쟁을 위해 논쟁의 전제조건을 정리해 보자. ① ‘의료계가 동의하는’ 원격의료란 존재하는가? ② 존재한다면 ‘동의의 조건’은 무엇인가?
의협의 입장이 ‘의료계가 동의하는 원격의료란 없다’는 것이라면 논쟁이 개시될 필요도 없겠지만, 그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조건부 동의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동의의 조건’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의료계의 논의는 오랜 기간 동안 개개인의 ‘사견 제시’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원격의료라는 이슈가 가진 폭발성 때문에 공식적인 논의 자체가 회피되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13만 의사를 대표하는 전문가단체라면, 그리고 수십 년간 제기되어 온 핵폭탄급 이슈라면 최소한의 입장이라도 정리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 이슈에 대하여는 반드시 의료계의 동의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강조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머리숱이 너무 많아 아침에 어느 쪽으로 넘길까를 고민하던 그런 젊은 시절은 누구에게도 다시 오지 않는다. 최선의 대응책은 ‘늦추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타성에 젖은 방식으로 상황을 ‘막으려다가’ 여론이 등 돌리는 순간 ‘폭풍같이’ 나빠지는 상황을 우리는 최근에도 여러 분야에서 - 유치원단체의 파업 시도, 야당의 연이은 선거 참패 등 - 보아왔다. 환자가 의사에게 소송을 걸면 법정에서 판사가 환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일부러 그랬겠느냐’라고 점잖게 훈계하던 그 시절은 아마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의료계는 ‘권위의 탈모’라는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좋은 때’에 대한 회상에 젖어 ‘나빠질 때’를 ‘폭풍같이 나빠질 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만의 질박하고 명쾌한 식견을 선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정부와 국민을 설득하고 ‘의사로서의 필수적 권위’를 잘 선별하여 지켜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국민의 건강을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보호하고, 모든 의사들이 성실한 전문가로서 안심하고 진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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