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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맘 편히’ 위로하기 위해
환자를 ‘맘 편히’ 위로하기 위해
  • 의사신문
  • 승인 2020.06.0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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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81)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의료과오를 주장하는 환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사망 등 심각한 사건이 아니라면, 많은 경우 재판부는 첫 재판 이전에 사건을 조정에 회부한다. 솔직히 말하여, 판사 역시 사람인지라 원만히 해결되어 판결문을 안 쓰게 되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새벽기도 안 하면 목사 할 만하고, 판결문 안 쓰면 판사 할 만하다’라는 농담이 괜히 있겠는가.

조정기일이 열린다. 조정위원 앞에서 양측은 기본적인 입장을 밝힌다. 그리고 이 때 환자측에서 십중팔구 나오는 말이 있다. “의사가 처음에 사과만 했어도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즉 의사가 사과했어도 환자가 소송을 제기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의사가 사과하였다면 그 대화는 ‘녹취록’으로 떡 하니 증거로 제출될 가능성이 십중팔구이다.

그래서 필자 역시 의료분쟁을 겪고 있는 의료진에게 조언할 때에는 ‘환자와의 대화시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은 주의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변호사도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는지라, 한편으로는 ‘혹시 이 건은 유감을 표시하고 잘 설명하면 끝낼 수 있는 건이 아닐까?’라는 미련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보다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보수적으로 조언하지 않을 수 없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처럼, 말 한 마디의 힘은 크다. 그리고 그 말 한 마디에 진정성이 담긴다면, 그 힘은 더욱 커진다.
폴란드는 18세기부터 2차대전 때까지 200년간 독일의 침략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당연히 폴란드 국민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1970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비석을 방문하여 ‘진짜로’ 무릎을 꿇었다. 그 날은 비가 오고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그 자신의 표현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을 사과했다.

이를 TV 생중계로 지켜본 폴란드 국민들은 서독에 대한 악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더구나 브란트 총리는 나치독일의 핍박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폴란드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사과를 했다”면서 더욱 감동했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종전 후 70여 년 동안 틈만 나면 망언을 일삼는 섬나라 극우파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원래 힘센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먹는 거 아니냐? 전쟁에서 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과하는 시늉을 한 거다’라는 것을, 자신들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음을 스스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각설하고, 사과는 이렇듯 강력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법적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진정성 담긴 사과로 분쟁을 종결시키거나 감소시키려는 법적 시도가 있어왔고, 이를 흔히 ‘사과법(apology law)’ 또는 ‘사과보호법(apology protection law)’이라고 한다.
사과법은 여러 나라들에서 이미 입법 및 시행되고 있는데, 먼저 대표적 사례인 미국의 사과법에 대하여 살펴보자.
미국에서 사과법은 1986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현재 41개 주가 입법으로 도입하고 있고, 이 중 40개 주에서 발효 중이다. 이 40개 주 중에서 32개 주가 사과법의 적용대상 분야를 ‘의료분야’로 한정하고 있으며, 나머지 8개 주는 의료분야를 넘어서 일반적인 불법행위분야까지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 사과법은 ‘의료분야’에서 주로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의료행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의료행위로 환자에게 손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를 통상적인 불법행위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국민들과 입법자들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미국의 사과법은 의료분야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였을 때 그에 대한 공감의 표현(expression of sympathy)의 효과 등을 규정하고 있다. 메사추세츠 주 법은 ‘...일반적 호의를 표현하는 진술, 서면 또는 제스처는 민사 소송에서 책임 인정의 증거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피해의 결과로 초래된 병원비용을 지불하거나, 이를 약속하는 등의 호의적인 행위 역시 법적 책임 인정의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사과의 유형을 잘못(fault)의 인정을 포함하지 않는 ‘부분적 사과’와 잘못의 인정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사과’로 구분하면, 미국 사과법이 보호하는 사과의 유형은 부분적 사과가 대부분이고(32개 주), 완전한 사과까지 보호하는 주는 일부(8개 주)에 그친다.
특기할 점은 완전한 사과까지 보호하는 8개 주는 모두 이를 의료분야에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해당 8개 주의 다른 분야에서는 ‘제 잘못입니다’라고 인정하면 그대로 과실 책임의 인정(admission)으로 간주하는데, 의료분야만은 ‘책임 인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가능한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를 회복시켜 분쟁의 원만한 해결을 유도하기 위함이고, 이는 의료행위의 특수성에 대한 정책적 배려에 기초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호주, 캐나다, 영국, 홍콩 등에서 사과법이 제정되어 운용되고 있는데,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사과법의 공통적인 목적은 ‘의료진의 언행에 대한 일정한 면책’을 부여하여 ‘당사자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촉진’함으로써 ‘분쟁 해결을 장려하고 소송에 기대는 비율을 낮추어 사회적 분쟁해결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환자의 예상치 못한 고통을 ‘맘 편히’ 위로하고 싶은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의료진이다. 사과법이 도입되어도 지금의 ‘의료과오 주장 남발’ 세태가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불신지옥’이자 ‘녹취공화국’인 대한민국에는 사과법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일반적인 불법행위법리를 적용함에 신중할 필요가 있는 의료분야에는 더욱 필요하다. 2018년 20대 국회에서 ‘환자안전법 개정안’ 형식으로 발의되기도 하였던 사과법을, 일하는 국회를 표방하는 21대 국회에서 ‘의료법 개정안’으로 심도있게 다뤄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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