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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제도와 비대면진료
보수적인 제도와 비대면진료
  • 의사신문
  • 승인 2020.05.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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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80)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세상은 참 빨리 변한다. 우상방을 찌르는 전세계 인구증가 그래프 같이, 사람들의 ‘인식’은 급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인식에 기초한 ‘제도’ 역시 정신없이 자주 바뀌고 있다. ‘변화’는 분야를 막론하고 선택명제에서 당연명제로, 당연명제에서 지상명제로 격상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가 잘 바꾸지 않는 ‘보수적인 제도’가 있다. 잘 바꾸지 않고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잘 작동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로는 무기체계를 포함한 군사제도, 장례제도, 재판제도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어떤 국가가 무기체계나 군사제도를 크게 변경하는 시기는 대부분 전쟁에서 대패한 후이다. 우리나라의 장례 절차에는 과거 상황과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현재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절차들이 있지만, 실제 장례를 치르게 되면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고려하여 천 년 이상 비슷하게 유지되어 온 기존의 절차에 따른다.
재판제도 역시 그렇다. 판사가 오판하면 생기는 결과를 잘 알고 있기에 오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채택된 행위자/고발자/판단자의 3면 구조는, 부분적 변경이 있어 왔으나 이천 년간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의료제도는 ‘보수적인 제도’에 해당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할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먼저 개별적 의료 측면(의사/술기)에서 보면, 의사의 교육과 수련, 의사의 술기 등에 관한 의료제도는 ‘비교적 보수적인 제도’에 해당한다. 명백하게 검증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료(진료)가 잘 작동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 즉 환자의 생명과 신체에 위험을 일으키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검증 안 된 약물이나 술기를 환자에게 시험해 본다? 2차대전 때의 일본군 731부대가 아닌 다음에야, 이러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 의료 측면(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에서 보면, 의료제도는 전혀 보수적인 제도가 아니다.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은 시대상황에 맞추어 크게 바뀌어 왔다.
고대에는 무당(샤먼)이 사회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중세 및 근대에 이르러서도 의료서비스는 사인 간에 거래되는 일반 용역 중 하나였고, 국가는 이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에 대하여 수천 년간 동시대인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의료서비스라거나, 의료서비스에 관하여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 1883년에 이르러 독일을 필두로 의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이후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어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민들의 경제력과 민도가 높아짐에 따라 국민들이 투표권을 매개로 국가에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지배층)는 이러한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서비스 제도’를 원하지 않았다. 세계최초의 건강보험을 도입하면서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망할 사회주의자들만 아니었으면 이런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이래 40년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을 성취했다. 이러한 우리의 성취는, 영역을 나누어 개별적 측면에서는 보수적 접근을, 전체적 측면에서는 시대상황에 맞는 접근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의료제도에서 의사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을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높아지는 국민의 요구에 맞추어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의 외연과 적용대상을 확장해 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는 ‘의사와 환자의 대면’을 전제로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것은 과거의 기술수준상 당연한 것이었다. 대면을 위해 고대에는 무당의 ‘신당’이나 신관의 ‘신탁소’에 환자가 찾아갔지만, 중세 이후로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왕진’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 눈부신 기술의 발달로 (비록 일부 질환에 해당하지만) 의사와 환자가 얼굴을 맞대지 않고 진료가 가능해졌다. 우리가 수천 년간 익숙해 있는 의료서비스 제공시스템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이 가능해 진 것이다.

최근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을 통해 ‘비대면 의료산업 육성 의지’를, 청와대 사회수석은 ‘원격의료 긍정 검토’를 밝혔고, 이어서 ‘비대면 진료 확대 필요’(총리), ‘원격의료 기반 마련’(산업부), ‘비대면의료를 위한 의료법 개정 논의를 촉구’(기재부) 같은 각 행정부처의 지원사격이 잇따르고 있다. 여당은 청와대에 속도 조절을 요구하면서도 원칙적으로는 찬성하고 있고, 야당은 뒤질세라 ‘우리가 예전부터 주장해 온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면서, 정치권의 흐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는 예전 글에서 원격의료와 관련하여 정부가 내건 목적은 의료사각지대 해소라는 보건의료적인 것이지만, 본심은 기업 지원과 경제 활성화라는 경제산업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를 ‘양두구육’이라고 비난하기 이전에, ‘일자리가 늘어난다’라는 ‘개고기’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1년에 몇 번 또는 몇 십 번 잠시 환자가 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에는 국민으로서 판단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안전한 진료’를 외치고 또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의미로는, 국민들은 좀 더 안전한 진료보다는 ‘개고기’를 원한다.
재화와 용역의 비대면거래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자본은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소비자는 ‘편의’라는 측면에서 비대면거래를 원하고 있다. 의사조차도 의료 이외의 분야에서는 비대면거래의 편의성에 익숙하지 않은가? 의료계는 그간 ‘의료의 특수성’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정부’와 싸워왔지만, 앞으로 이러한 ‘시대’와 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거인인 골리앗과 맞서 싸운 다윗도, 거대한 파도와는 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본 것 같은 행정부의 발언에 의협은 강력반발하면서 극단투쟁을 경고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반발이, 저수가 문제와 의료전달체계 문제를 포함하여 충분히 검토되어 있는 ‘의료계의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된 하나의 ‘협상용 카드’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국민과 의료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위기를 기회로 뒤집는 절묘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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