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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개원의 경력만 칠순 넘겨···"제 건강 비결은 진료 보는 것"
[창간특집] 개원의 경력만 칠순 넘겨···"제 건강 비결은 진료 보는 것"
  • 배준열 기자
  • 승인 2020.05.19 0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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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고(最古)의 동네병원 ①] 윤원몽 윤의원 원장(용산구 동부이촌동)
22세 때 포천서 처음 개원, 1974년 이촌동 이전해 현재까지 한자리 지켜
이회창·노사연-이무송 부부 등 단골···10대 소년 고객이 이젠 손주와 방문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위치한 '윤의원'. 지난 1974년 이곳에서 개원한 이래 47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윤의원의 윤원몽(91) 원장<사진>이 이촌동에 터를 잡았을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의대에 입학했던 의학도들 가운데 의대교수를 지낸 이들이 지난해 만 65세의 정년을 채워 퇴임했지만 윤 원장은 여전히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47년이란 세월은 개원 당시 태어났던 이들도 의사로 성장했다면 40대 후반의 관록 있는 '중견' 의사가 되어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사실 의사로서 윤 원장의 이력은 이촌동으로 오기 한참 전부터 시작됐다. 이미 22세 때 포천 일동에서 처음으로 동성의원을 개원해 5년, 이후 한남동에서 약 20년간 의원을 운영한 뒤 현재의 자리에 윤 의원을 연 것이다. 개원 경력만 70년이 넘었다. 올해로 창간 60주년을 맞은 의사신문이 앳돼 보일 정도다.

윤 원장은 인턴제 도입 이전에 의대를 나와 졸업하자마자 개원했다. 그와 함께 입학했던 의대 동기들은 어느덧 하나둘 세상을 떠나갔고, 지금은 손에 꼽을 정도인 동기들도 이미 오래 전에 모두 청진기를 내려놓았다. 그만이 유일하게 지금도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들며 매일 같이 진료를 하고 있다. 

동년배 어르신들의 경우 단순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운 경우가 많지만 윤 원장은 지금도 매일 진료를 하고 있다. 그것도 소일거리 수준이 아니라 하루 내원 환자가 40~50명 수준이다. 기자가 방문한 평일 오후에도 환자 방문이 끊이지 않아 인터뷰를 끊어가며 수차례에 걸쳐 이어가야 했다. 덕분에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오전 9시에 병원문을 열고 오후 5시에 문을 닫는 일상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환자에게 청진기를 갖다대는 손길은 여전히 섬세하면서도 신중했다. 진료 차트를 보는 눈매 역시 날카롭고 매서웠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그 모습이 '구도자(求道者)'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의문이 남았다. 왜 이 나이까지 진료를 하는 것일까. 

“환자들을 진료해야 정신도 더 또렷해지고 스트레스도 해소됩니다.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사랑으로 돌보며 진료를 하는 것이 저의 의무이자 보람이고 한편으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인 셈이죠.”

윤 원장의 설명이다. 건강관리 비결도 따로 없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골프를 꽤 치기도 했지만 역시 저에게 최고의 건강 비결은 따로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진료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은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 여자가 의사를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북간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등을 하면 의대를 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서울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처음 개원해 꿈을 이루어냈고, 이후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료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포천 일동에서 동성의원을 운영할 당시 윤원몽 원장과 당시 군인으로 복무 중이었던 남편(육군 소장으로 예편)
포천 일동에서 동성의원을 운영할 당시 윤원몽 원장과 당시 군인으로 복무 중이었던 남편(육군 소장으로 예편)

개원의로서 7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일제시대부터 해방과 건국, 6·25전쟁, 군사정부, 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대통령 탄핵 등 한국사의 온갖 굴곡을 모두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그를 거쳐간 유명인들도 적지 않다. 

세 차례 대선에 나섰던 이회창 전 총리는 지금도 가끔 윤의원을 찾는다. 전직 대통령 중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 왕진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동네 주민 중에는 가수 현미, 노사연·이무송 부부가 그의 단골 환자들이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평생 단골이 적지 않다. 심지어 4대째 윤의원을 찾는 가족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환자가 이제는 손자와 함께 병원을 찾기도 한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해진 단골 환자들은 이제 서울에, 아니 전국 어디에도 더이상 윤의원 같은 병원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추억을 곱씹으며 복고(復古)를 고집하는 열성팬인지도 모른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한 여성 환자가 근 50년째 윤 의원의 단골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원장님이 너무너무 잘해 주셔서 다른 병원은 안간다. 최고다"라며 엄지 손가락을 ‘척’하고 들었다.

“의사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도 하죠. 어찌 보면 환자 몫까지 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 무엇보다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게 가장 큰 낙입니다. 의사의 길을 택해서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도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싶네요.”

거리에서 본 윤의원의 녹색 간판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복고 거리를 재현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70년대의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를 간직한 듯한 공간은 생생한 현재로 바뀐다. 앳된 표정의 윤 원장이 20대 초반 처음 개원했을 때처럼 여전히 '꿈'을 가슴 벅찬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계속해서 환자를 만나겠다는 그 꿈은 20대 초반 포천 일동에서 처음 개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90세가 넘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윤 원장의 꿈이 오래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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