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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장 입김에 휘둘리는 ‘공중(公衆)' 보건
지자체장 입김에 휘둘리는 ‘공중(公衆)' 보건
  • 홍미현·권민지 기자
  • 승인 2020.02.17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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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위기의 보건소, 이제는 바꿀 때' 下
의료전문가 아닌 지자체장이 보건소장 '상명하복'식 지휘
박홍준 회장 "'의료'를 선심성 '복지'의 수단으로 사용"
작년 9월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들이 공중보건의사들을 앞세워 불법적인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강행하려는 서천군을 항의방문해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작년 9월 서천군 소속 공중보건의들에게 서천군수 명의의 서면 ‘경고문’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공보의들이) 공무원의 복종의무를 위반하면 행정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당시 서천군청은 보건지소의 공중보건의와 방문간호사를 연계해 군 내 의료취약지를 대상으로 월 1~2회 방문 혹은 원격으로 진료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용의 시범사업을 실시하기로 했다. 일종의 ‘원격의료’ 시범사업이다. 

해당 공보의들은 현행법상 금지된 의사-환자간 원격의료 행위에 해당할 수 있는 데다, 만약의 의료사고 발생시 책임소재조차 명확하지 않다며 난색을 표했다. 의협도 환자 안전을 위해 “‘상급자’가 공보의에게 부당한 원격의료 업무 지시를 내릴 경우 (공보의는) 의료전문가로서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군청이 군수 명의의 경고장을 보내 ‘상급자’의 명령에 따를 것을 종용한 것이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확산 사태에서 방역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보건소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본지 5351호 1면 ‘방역의 ‘첨병’돼야 할 보건소, 방역의 ‘구멍’될라’ 참조>이 잇따르고 있다.

의료 전문가들은 이처럼 보건소가 질병의 예방 같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1차진료나 원격진료 같은 곁가지에 집중하는 데에는 의료전문가가 아닌 지자체장으로부터 ‘상명하복’식 지휘를 받는 구조적 문제점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최근엔 보건소장 역시 의사가 아닌, 일반 행정 공무원이 맡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 보건소가 ‘공중보건’이란 본연의 역할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홍준 서울시의사회장은 “보건소장의 인사권을 가진 지자체장들이 ‘의료’를 선심성 ‘복지’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보건소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말 의료보호 사업 실시로 보건소의 1차진료 기능 강화

우리나라 보건소의 역사는 해방 직후인 지난 1946년 서울에 ‘모범보건소’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각 시군에 지금과 같은 보건소 체계가 자리잡게 된 것은 지난 1962년 보건소법의 전면 개정으로 도시의 경우 인구 10만명 당 1개, 농촌 지역은 군 지역 당 1개의 보건소를 설치하도록 하면서다. 지난 2018년말 현재 전국의 보건소는 254곳,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 등을 포함하면 총 3553곳이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건소의 주된 역할은 감염병 예방 및 관리 같은 ‘공중보건’이었다. 지금처럼 보건소가 1차 진료에 치중하게 된 것은 지난 1977년 의료보호 사업이 실시되면서 보건소의 1차진료 기능이 강화된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이듬해 국민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농어촌 지역에 공중보건의가 배치돼 의료취약지의 의료공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1988년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제도 실시에 대비해 정부가 의료취약지에서 보건소가 병원의 역할을 하도록 독려하면서 보건소가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맡는 것이 보편화됐다는 분석이다. 

의료계는 보건소에서 일반진료를 보는 것이 관행이 되면서 지역주민들까지 보건소의 주요 업무를 일반진료로 오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보건소의 진료 기능을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자체장들조차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선 지자체장 입김에 휘둘리는 보건소…“1차 의료기관과 갈등 발생할 수밖에”  

의료계는 1980년 농특법 발효 이후 민간의료기관이 늘어나면서 의료취약지가 감소되는 경향을 보였고, 최근엔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의료기관인 보건소가 민간 의료기관과 경쟁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건소의 역할 변화가 시급하다는 얘기다.

특히 의료 취약지라 하더라도 이제는 1차의료 전반이 아닌, 산부인과나 정신과 같은 특정 전문과를 중심으로 관련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대다수 보건소가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일반진료를 보는 방식은 의료취약지역 해소라는 과거의 보건소 설립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건소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의료전문가나 보건복지부가 아닌,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지자체장이 보건소를 좌지우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비전문가이자 정치인인 지자체장 입장에선 표를 의식해 보건소를 주민 ‘복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흔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성종호 의협 의무이사는 “현재 보건소가 일반진료를 게속 이어가는 것은 보건소의 업무가 복지부와 연관돼 있음에도 (지휘체계상) 지자체 소속이어서 지자체장의 의지와 정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무식 건양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도 의료정책포럼 기고문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장의 선심성 복지․보건의료 공약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보건소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공약을 이행하려 하다 보면 지역사회 1차 의료기관과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는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보건소의 기능 개편’ 보고서 등을 통해 보건소가 “지역보건의료사업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진료 기능만 남기는 방향으로 일반 진료기능을 축소하고 공공보건 분야 기능은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일반진료 축소·폐지하고 감염병 대응, 공중보건 업무 등에 집중할 때

의료계는 코로나19 확산에 맞서 보건소가 일반진료 기능을 멈추는 대신 ‘선별진료’와 의료기관으로부터의 문의 응대 등 일종의 코디네이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보여준 우리 보건소의 대처는 상황을 관리하고 통제하기는커녕, 민간 병원이 의심환자로 판단한 환자를 귀가하도록 조치하는 등 현장의 혼란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보건소가 원래 해야 할 ‘핵심’가치에 집중하지 못하고 진료 확대 같은 선심성 사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메르스나 이번 코로나19 같은 대형 감염병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취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성종호 이사는 “보건소는 감염병 예방 등의 역할은 물론, ‘공중위생’과 ‘공중보건’에 초점을 맞춰 민간의료기관이 할 수 없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선 보건소에서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공중보건의들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보건소가 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공협이 지난해 8월 발간한 ‘보건교육 사업 및 공중보건기획관’ 정책제안서는 현재의 보건소 운영방식을 기존 ‘진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한편, 공중보건의 에 대한 행정․보건 관련 직무교육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는 실제로 공중보건의가 일상적인 진료 대신 지역 보건사업의 기획을 주도함으로써 지역주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은 사례를 소개해 눈길을 끈다. 지난 2017년 강원도 평창군에서는 공중보건의가 다양한 진료·보건사업의 기획 등을 진두지휘함으로써 지역 특성에 맞춘 보건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사업 초기엔 지역 공무원과 지역 주민들이 진료 기능을 축소하는 데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엔 지역 주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박홍준 회장 “의료전문가가 보건소장 맡아 보건소 기본개념 새로 정립해야”  

이처럼 현재 1차진료 위주로 운영되는 보건소에 ‘혁신’을 불러오기 위해선 비전문가인 지자체장이나 행정공무원이 아닌, 의료전문가인 의사가 보건소 운영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의료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갈수록 행정직 공무원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보건소장을 의사가 맡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의료계는 주장한다. 

즉, 현재 지역보건법시행령에서 “의사 인력의 임용이 어려운 경우에 한해 보건 등 직렬의 공무원을 보건소장으로 임용할 수 있다”고 명시한 ‘단서조항’이 의사가 아닌 사람을 보건소장으로 임명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2018년 12월 현재 전국 254개 보건소 가운데 의사가 보건소장을 맡고 있는 곳은 99곳으로, 전체의 38.9%에 불과하다. 

박홍준 서울시의사회장은 “보건소장이 개방형으로 바뀌고 구청장이 임명하게 되면서 구청장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며 “의료전문가가 보건소장을 맡아 ‘의료법’을 바탕으로 보건소의 기본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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