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소송에 관한 소소한 소송외적 조언들
의료소송에 관한 소소한 소송외적 조언들
  • 전성훈
  • 승인 2020.02.11 1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68)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법학계에 유명한 법언이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aequitas subvenit).”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받아야 하며, 권리 행사에 성실하지 못함으로 인한 불이익은 자신이 지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법언이 나왔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사회적으로 근대시민사회가 성립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여러 이유로 인해 시민의 권리의식을 고양할 필요가 있었던 시기였기에 이러한 ‘권리 주장’은 장려되었다. 이후 100여 년간 정치면에서 민주주의는 큰 발전을 이루었고, 사회면에서 시민의 권리의식도 크게 고양되었다. 그래서 위 법언은 이제는 ‘old fashioned’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어떠한가? 뭔가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화끈한 한국사람들이 아니던가. 권리 위에서 잠자기가 웬 말, 권리 위에서 칼춤을 추는 사람들이 많다. 인구 대비 고소율이 일본의 100배(10배가 아니다!)이고, 길을 가다 보면 ‘일조권 침해하는 OOOO 자폭하라’, ‘사기꾼 풀어준 검사 OOO, 판사 XXX 구속하라’ 같은 플래커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또한 의료계는 어떠한가? 진료를 하다 보면 일정 비율로 ‘예민한’ 환자를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오랜 기간 진료를 하다 보면, 의사도 사람인지라, 한두 번의 실수는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일정 비율로 만나는 예민한 환자와, 한두 번인 있기 마련인 의사의 실수가 만나는 경우, 환자의 가차 없는 ‘권리 주장’이 따라온다. 흔히 말하는 ‘의료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의료분쟁 전체에 관해 설명하자면 책을 몇 권 써도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의료분쟁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룬 적이 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의료소송에 관해서 소소하지만 판단에 도움이 되는 한두 가지 질문과 답변을 살펴보겠다.

첫째 질문은 변호사의 선임 여부에 관한 것이다. “저에게는 아무런 과실이 없는데, 환자는 막무가내로 의료과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사소송을 제기했네요. 그러면 과실이 있는지는 누가 증명을 해야 하나요? 제가 증명을 해야 한다고 하면, 진료 보느라 바쁘기도 하고 법은 잘 모르니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 같아서요. 환자가 증명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름대로 제가 반박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액수가 큰 사건이라면 큰 고민 없이 변호사를 선임하겠지만, 애매한(?) 액수일 때 고민하면서 흔히 묻는 질문이다.
원칙적으로 민사소송에서는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피고의 과실을 증명할 책임이 있다(증명책임원칙). 그렇지만 법원은 이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한다면 환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원칙의 예외로 ‘증명책임의 완화’라는 법리가 형성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여, 의료행위의 전후에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만한 다른 원인이 없었다면, 일단 의료과실과 악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것이다.

의사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한 기분이 들겠지만, 법원은 의사들에게만 이런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소송 등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같은 예외를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첫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와 같다. “의사가 자신의 과실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현재 소송실무입니다. 만약 환자의 공격에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면, 판사가 자칫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가 3,000만 원 이하의 민사소송사건은 의료전문재판부가 아니고 의료를 전혀 모르는 소액재판부에 배당되니까요. 만에 하나 패소시 병원 운영에 여러 모로 악영향을 미치므로, 정말 소액이 아니라면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응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낑낑대면서 법원 판례 찾아보실 시간에 진료 보시는 것이 훨씬 생산적입니다.”

둘째 질문은 다른 의료인의 술기에 대한 언급에 관한 것이다. “어떤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수술 받고 예후가 안 좋아 우리 병원에 오셨는데, 제가 진료하면서 ‘이거 어디서 하셨어요?’라고 물어봤어요. 별 의도 없이 현재 상태와 향후 치료방향에 대하여 이런 저런 소견을 드렸는데… 나중에 그 환자가 이전에 수술한 병원과 의사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제가 그 때 한 말을 녹취해서 증거로 제출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생님한테 너무 미안한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요?”

물론 위와 같은 한 마디 말로 소송의 승패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법원은 사건 초기에 당사자가 한 가감 없는 의사표현에 많이 주목한다. 성범죄를 예로 들면, 사건 당시 남녀가 둘만 있는 상황이 대부분이고, 그 중 상당수는 남녀 모두 술까지 취하여 있었던 상황이니, 판사도 사건 당시의 상황을 추후에 상식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첫 카톡이 ‘미안해’라면, 판사는 ‘뭔가 미안할 일이 있었구나’라고 일단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판사가 위와 같은 의사의 소견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동시에 이런 대화가 피고(의사)에게 상당히 불리한 증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소액사건에서는 원고(환자)는 비용이 드는 신체감정 등을 하지 않고 위와 같은 녹취 등을 확보해서 의사의 과실에 대한 증명을 갈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재판부가 의료를 전혀 알지 못하는 소액사건재판부라면, 이러한 우회적.편법적 입증을 그냥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피고에게 매우 불리한 진행이다.

따라서 다른 의료인의 술기나 다른 의료분쟁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한 번은 생각하고 첫 대응을 할 수 있으니, 만에 하나 부주의한 언급이 나오지 않도록 유념하고 봉직의나 직원들에게도 평소에 충분히 교육을 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들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와 같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판사님이 그것만으로 판단하시지는 않으시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앞으로는 이전 진료나 술기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보수적으로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녀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의사 환자 관계에서도 ‘첫 마디’가 중요하니까요.”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만약 환자가 의료과실을 주장하면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면 일단 사건 내용을 잘 정리해서 소장, 진료기록과 함께 변호사에게 제공하고 의견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이 때 당연히 변호사의 자문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용은 가래 구입이 필요한지 판단하는데 필수적인 호미값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호미값을 아끼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