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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회째 (클래식 이야기)를 마감하며
500회째 (클래식 이야기)를 마감하며
  • 의사신문
  • 승인 2020.02.1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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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재 원한양대구리병원소아청소년과 교수
오 재 원 한양대구리병원소아청소년과 교수

<클래식 이야기>를 집필하며 지낸 12년은 나에겐 축복이었고 감사의 시간이었다. 사계절이 열두 번 바뀌면서도 언제나 음악은 곁에 흐르고 있었다. 출장이든 휴가든 지방이나 외국으로 여행을 할 때에도 언제나 멋진 음악이 함께 하였다. 밤늦은 시간까지 환자를 돌보거나 홀로 진료와 연구에 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고단하고 힘들었을 때에도 음악과 함께 하면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는 듯 마냥 즐거웠고 어릴 적 어머니의 무릎베개를 베는 것처럼 푸근하기만 하였다.

2005년 1월 의료원 매거진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 제안으로 <클래식스토리> 라는 이름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첫 회로 요한 세바스천 바흐의 음악을 소개하였고 그 후 해를 거듭하면서 입소문이 나고 여러 사람이 즐겨 읽게 되면서 2008년 2월부터 ‘의사신문’ <클래식 이야기>에 매주 연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클래식 음악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지 15년, 이 글들을 모아 정리하여 ‘필하모니아의 사계 I’을 출판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러 이제 ‘필하모니아의 사계: 클래식501’전집을 마지막으로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구슬치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매 끝으로 유리구슬을 호호 불어가며 열심히 닦아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보물처럼 모아두곤 하였다. 이제는 음악 서적을 뒤지거나 인터넷을 찾아보고, LP음반이나 CD 해설서를 읽으며 한 곡, 한 곡씩 글을 쓰다 보니 구슬 대신 501곡의 찬란한 보석 같은 클래식 음악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501곡을 구슬처럼 꿰어 전집 ‘필하모니아의 사계: 클래식 501’세트로 출판하게 되었다.

세상 모든 일 다 그렇다고 하지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천천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마지막 악장을 치듯
치는 도중 찻물 끓어 그만 의자에서 일어섰나,
곡이 끝나듯
그렇게 살고 싶다.
- 황동규, ‘버클리 풍의 사랑노래’ 시집 중  <봄날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며> 중에서

이 시는 베토벤의 여러 아름다운 곡의 악장들 가운데서도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악장에 바친 헌사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이 곡을 듣다 보면 끝머리의 화려함도 없이 끝나는 줄 모르게 끝나버린다. “속도가 느리면서 서정적인 아라우 연주의 그 곡속에는, 늘 바람 센 미시령의 어느 바람 없는 날 무한 곡선의 호랑나비가 날기도 하고, 바로 전 해에 방문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시에나 두오모 성당, 오후 두시 햇빛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모자이크들을 모두 지우며 성당을 온통 빛으로 채우고, 그 빛 속에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무한을 느낀 체험이 재현되기도 했다.”

시인의 글에 또 한 번 공감하며 이 곡을 다시 듣는다. 어디 베토벤, 아라우뿐이었을까? 바흐, 비발디,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가 그렇고 이를 연주하는 오이스트라흐, 바크하우스, 푸르트벵글러, 발터 등 그야말로 이루 셀 수 없는 거장들로 둘러싸인 깊고 울창한 음악의 숲을 사색하며 천천히 거닐 듯 그렇게 살고 싶다.

음악은 우리의 무기력하고 땀에 절어 무거워진 육체를 드높여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도약하게 하는 생명력이 있다.
또한 음악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시대를 감도는 분위기와 리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으며 존재한다. 철학자 장자크 루소,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등은 음악애호가이자 아마추어 연주자였다. 그들은 음악적 경험을 서재로 불러들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피아노를 통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무겁고 심오한 것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건반 위는 열정을 충전하고 절망에 맞서 싸우며 자기 구원을 이뤄낸 성소였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에 있어서도 피아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자신의 샘솟는 철학적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에게서 파이프 오르간은 철학, 신학, 의학의 그 혼돈세계 속에서 진리를 위한 투쟁의 무기였다. 이렇듯 자기만의 연주는 자유의 길이자 정처 없이 거니는 기쁨이 되었다. 이러한 대철학가들의 심오한 경지까진 아니더라도 그들처럼 나도 나만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감상하며 이 환상의 세계인 음악의 숲속에서 나의 학문도 결실을 맺어왔다. 실체 없이 머릿속에 떠돌던 나만의 상념에 윤곽선을 그리며 꿈도 조금씩 실현되었다. 이처럼 음악은 평범한 나의 일상을 특별한 시간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아마 12년간의 <클래식 이야기>의 집필은 각 분야의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아낌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는 단지 12년의 세월이 아닌 육십 평생을 지내오며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부모님을 위시하여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과 함께 끈끈한 인연을 쌓았던 분들의 인지하지 못했던 인력에 의해 이끌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12년간의 여정을 무사히 마감하게 된 기쁨과 영광을 이 분들께 돌리고자 한다.  

500번째 곡을 마지막 탈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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