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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ve it!
Prove it!
  • 전성훈
  • 승인 2020.01.21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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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66)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여러 아이들 앞에서 언쟁을 하고 있다. 제일 높은 산과 제일 깊은 바다 중 어느 것이 더 높으냐/깊으냐 하는 것이다. 답을 알고 있는 어른들에게는 시시한 문제이겠지만, 5세인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이다.
아이들은 산파와 바다파로 나뉘어 옥신각신한다. 그러다가 점점 산이 더 높다는 결론으로 기운다. 이제 산파의 승리로 끝난다 싶을 때, 바다파 아이가 비장의 승부수를 던진다. 증거 있어? 승리를 확신하던 산파 아이는 당황한다. 결국 ‘쌤한테 물어보자’라고 무승부가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성장과정에서의 소소한 논쟁 중 ‘증거 있어?’라는 공격/방어를 수없이 경험했다. 서양 아이들은 보통 ‘Prove it!’이라고 한다. 이렇게 증명은 어떤 주장 또는 사실의 옳고 그름을 상대방과 제3자에게 보여주거나, 상대방과 제3자를 설득할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에게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두려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시인들은 천둥과 벼락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와 같은 자연현상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세인들은 로마 시대에 건설된 수로교(水路橋)의 건설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스페인 세고비아의 장대한 수로교를 ‘엘 푸엔테 델 디아블로(악마의 다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천연두와 같은 역병은 역신(疫神)이 사람에게 붙은 것으로 생각했기에 귀신을 겁주어서 쫓아내는 ‘축귀’나 살살 달래서 풀어주는 ‘굿’을 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더 이상 천둥과 벼락이 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필요하면 수로교를 스스로 건설하며, 역병을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접종받는다.

인간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두려움의 대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미지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인 ‘증명’을 위해 문명의 초기부터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다.
동양에서는 인간과 세계를 음양(2)-사상(4)-팔괘(8)를 조합한 육십사괘(64)로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하는 주역(周易), 그리고 생년.생월.생일.생시라는 4주를 근간으로 육십갑자로 이를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하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등이, 서양에서는 천체 현상을 관측하여 인간의 운명과 장래를 예측하는 기술인 점성술 등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인지가 발달하면서 이러한 예측론들은 힘을 잃었고, 이와 함께 발전해 오던 ‘종교’ -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로서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가 설명/제시하였다고 믿는 원리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운영하려는 시도 - 가 사회의 지배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를 통해 미지의 현상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약 이천 년간 지속되었다.
종교에 의한 증명과 이해의 한계에 다다르자, 인간은 증명과 이해를 향한 열망을 종교와 함께 꾸준히 발전하여 온 ‘과학’에 쏟기 시작했다. 과학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얻어낸 자연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물의 구조.성질.관계.법칙 등을 논증과 증거를 통해 증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과학은 증명과 이해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구체화하는 시도로서 대체불가능한 지위를 확립했다. 그리고 과학의 한 분야로서 인체에 대한 이해를 열망하는 의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관찰-가설-예상-실험-증명-일반화)을 통해 증명되고,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과학이지만 증명이 되지 않고 대중에게 사용되는 것이 있다면? 설마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있다. 그것은 한약이다.
의약품이 대중에게 사용되려면 선행적으로 그 안전성 및 유효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함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한 검증을 전문가집단의 판단에 맡긴 것은, 의학이 오랜 기간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엄격하게 증명해 왔음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한의원에서 지어주는 한약의 경우 의약품과는 달리 안전성이나 유효성에 대한 검증을 하지 않고 있다. 해당 한약이 안전한지, 효과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증명은 하지 않겠으나, 이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종교에 가깝다.
게다가 한의원에서 지어주는 한약은 한약에 포함된 원료나 성분은 물론이고, 한약재의 원산지조차 표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잠시 씹다 뱉는, 손가락만한 껌 조차 원료와 성분을 모두 표기하도록 하는 것이 법이다. 하물며 한약은 껌보다는 중요하지 않은가?

한의계는 한의원에 유통되는 한약재는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우수 의약품 제조.관리 기준) 시설을 거쳤으므로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GMP 시설에서 생산된 한약재들 중 무시 못할 비율의 한약재에 대하여 식약처 및 지방식약청이 품질부적합을 사유로 판매중지, 회수, 폐기 등의 처분을 내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좋다. 백보 양보하여 한의계의 주장대로 GMP 시설을 거치면 안전한 것이라고 인정하자. 그러면 앞으로 의약품도 원료와 성분을 표기하지 않되, 같은 시설을 거쳐 그 안전성과 유효성을 담보하도록 하겠다. 정부당국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의료계는 국민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한약에 대한 안전성 및 유효성 검증이 필수적임을 오랜 기간 주장해 왔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부당국은 침묵하고 있고, 국민들은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여전히 ‘과학’의 이름으로 마시고 있다.

얼마 전에도 전문의약품인 경구용 스테로이드제제 ‘덱사메타손’을 넣어 한약을 제조하여 통풍 치료 특효약이라고 하면서 판매한 한의사가 적발되어 약사법 위반(불법의약품 제조.판매)으로 처벌되었다. 해당 한의사는 덱사메타손 1일 최소 복용량의 2.4배를 복용하도록 환자에게 용법.용량을 지시했다. 장기복용에 대한 부작용은 고려한 것일까?

그렇기에 신년에는 한의계에 제발 당부하고 싶다. ‘Prov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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