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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개 구충제 신드롬'···전문가 불신이 키운 괴물
[칼럼] '개 구충제 신드롬'···전문가 불신이 키운 괴물
  • 권민지 기자
  • 승인 2020.01.20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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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최근 일부 암 환자들 사이에서 열풍이 불고 있는 펜벤다졸을 구매해 보려고 동물병원과 약국 10여곳을 뒤져봤다. 당산동의 한 동물병원에 연락해 약을 구할 수 있냐고 묻자 수의사로부터 “사람한테 쓰면 안 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에게 쓰려고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이 관계자는 으레 펜벤다졸을 복용하려는 암 환자나 가족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개 구충제가 항암 효과를 가진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된 지 약 4개월. 작년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비롯해 대한암학회 등 전문가와 관계기관은 일찌감치 펜벤다졸엔 항암 효과가 없다며 복용 금지를 권고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펜벤다졸은 갈수록 품귀현상을 빚으며 가격도 3000원부터 2만원까지 천차만별로 거래되고 있다. 지난 9일엔 펜벤다졸에 대한 항암 효과 임상시험을 실시하려던 국립암센터가  "근거나 자료가 너무 부족해 임상시험의 가치가 없어 진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펜벤다졸을 신봉하는 이들로부터 소위 댓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개 구충제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개나 먹는 줄 알았던 개 구충제가 신드롬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작년 9월 외국의 한 유튜버가 펜벤다졸의 항암 효과를 주장한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에 의료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이 한 주장이 사실인 양 확산된 것이다. 이후 전문가들이 잇따라 항암 효과를 부정하는 공식 발표를 했지만 환자들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암 투병 중인 개그맨 김철민씨의 복용 후기가 일반인들에겐 더 공신력 있는 정보로 인정받는 모습이다. 

일부 말기암 환자들의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강정한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라도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임상시험할 의지가 있는 것”이라며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상태인 경우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사재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의 펜벤다졸 열풍은 살고자 하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소수 말기암 환자나 그 가족들에 국한된 현상을 넘어선 듯하다. 지난해 11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펜벤다졸의) 암 치료 효능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임상실험을 정부차원에서 진행해달라”는 게시글에는 약 9000명이 찬성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최근엔 사람 구충제인 '알벤다졸'이 당뇨와 비염에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이에 대한 사재기 열풍까지 불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전문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지난 2017년에 발표된 ‘한국사회 전문가의 권위와 신뢰에 관한 연구’란 논문은 “국민들이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이나 능력, 선의, 투명성 모두를 신뢰하지 않는다”며 “전문가 개인의 의견을 믿는 것이 아니라 비록 비전문가 집단이라도 다수의 사람들을 거치며 집단적으로 가공된 정보나 지식을 더 객관적이라고 판단한다”고 설명한다. 전문가의 말보다 조횟수가 높은 유튜브 영상을 사실로 믿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전문가, 특히 의료 전문가의 의견은 '믿든지 말든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믿어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전세계 최악의 의약품 사고로 불리는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전문가의 말을 불신할 경우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20세기 중반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은 채 임신부 입덧방지용으로 팔려나간 탈리도마이드로 인해 1만2000여명의 기형아가 탄생했다. 전세계 48개국에서 판매된 탈리도마이드는 유독 미국에서만은 힘을 쓰지 못했는데, 이는 탈리도마이드가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FDA(미국 식품의약국), 그 안에서도 의사 출신인 고(故) 프랜시스 켈시 박사가 끝까지 시판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문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참사가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더불어 전문가들도 이처럼 대중과 멀어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대중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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