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도마이드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
탈리도마이드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
  • 전성훈
  • 승인 2020.01.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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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65)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이 내보낸 이미지 광고의 헤드라인이다. 이는 세계일류가 되겠다는 기업 차원의 다짐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이 기업은 10여 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일류 기업이 되었다.

어느 나라에나 위와 유사한 말들이 있지만, 위와 같은 ‘1등주의’가 사회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배, 분단, 내전이라는 3단 펀치를 맞고 말 그대로 ‘가루’가 된 나라가, 기적처럼 부활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기적의 원동력은 ‘해야 한다’라는 국가적 절박함과 ‘이겨야 한다’라는 개인적 경쟁심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무얼 해도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왔다. 단적인 예로, 국내적으로는 대입시험이나 사법시험 1등을 ‘수석’이라는 이름으로 예찬했다. 몇 점 모자란 2등도 1등과 같은 노력을 했을 것임에도 말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리는 거의 유일하게 총 메달수가 아닌 금메달수로 순위를 매겼다. 무의식중에 우리 모두는 1등 1명이 2등 10명보다 값지다고 인식해 온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대형사고조차 사망자 수로 줄 세운 목록의 1등만을 기억한다. 30여만 명이 사망하여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된 2004년 인도양 대지진, 17만 명이 사망하여 최악의 붕괴사고로 기록된 1975년 중국 반차오 댐 붕괴사고, 583명이 사망하여 최악의 항공사고로 기록된 1977년 스페인 페네리페 항공기 충돌사고 등이 그것이다. 참고로,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10등, 269명이 사망한 KAL기 격추사고 역시 10등이다.

최악의 의료사고는 무엇일까? 각각의 환자마다 개별적,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의료의 특성상 의료사고로는 여러 명이 사망하기 어려우므로, 최악의 의료사고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의약품은 대량생산되어 대량소비되므로, 약해(藥害)사고는 대규모로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악의 약해(藥害)사고는 무엇인가? 그것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다.

독일 그뤼넨탈 사는 1957년 탈리도마이드(N-프타릴글루탐산아미드)를 ‘콘테르간’이라는 이름의 임부 입덧방지/수면제로 출시했다.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실험에서 어떠한 부작용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뤼넨탈 사는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무독성’ 제품이라고 광고했고, 전세계의 많은 임부들이 이를 복용했다. 그런데 이 약을 복용한 임부들에게서 사지가 없거나 짧은(해표지증) 신생아들이 태어났다. 게다가 이 아이들에게서는 해표지증 이외에도 단지증, 심장 기형, 뇌 손상, 시력.청력 상실, 자폐증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고, 생존률 자체도 낮았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탈리도마이드 베이비(Thalidomide Baby)라고 불렀다.

1962년 최종적으로 판매금지될 때까지 5년간 사용된 탈리도마이드로 인해, 전세계 48개국에서 1만 2천여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이 사건은 ‘콘테르간 스캔들’이라고 불리며 최악의 약해사고로 현대의학사에 기록되었다.
최근 국립암센터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다름 아니라 국립암센터는 논란이 되고 있는 개 구충제 성분인 ‘펜벤다졸’의 항암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시험을 ‘사회적 요구도가 높아’ 검토했다가, 2주간의 검토 후 근거와 자료의 부재로 도저히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이를 취소했는데, 이에 대해 펜벤다졸의 항암 효과를 신봉하는 일부 환자와 가족 등이 국립암센터의 임상시험 취소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국립암센터의 주무기관인 보건복지부, ‘개 구충제 무용론’ 입장을 밝혔던 식품의약품안전처, 역시 같은 입장을 밝혔던 대한의사협회 등도 싸잡아 비판하는가 하면, ‘임상시험을 취소한 이유는 펜벤타졸은 항암제로 개발해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펴고 있다.

앞서 본 탈리도마이드 사건으로 인해 유럽과 일본에서는 각각 수천 명이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에서는 단 17건의 피해만을 입었다. 탈리도마이드의 피해로부터 미국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FDA가 끝까지 시판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FDA 심사관(reviewer)이었던 프랜시스 켈시 박사 덕분이었다.
켈시 박사는 탈리도마이드 시판승인신청에 대해 자체 실험자료가 미비한 점,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검토가 불충분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 제약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실험을 거쳐 보완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며 6번에 달하는 승인신청을 1년간 거부했다. 이후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이 밝혀졌고, 그녀 덕분에 미국에서의 탈리도마이드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그녀는 이 공로로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본인이, 또는 가족이 암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고의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가 반복하여 무용론을 밝혔음에도, 이조차 믿지 않는 우리 사회의 불신 세태에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심지어 ‘펜벤다졸과 같이 암세포의 골격을 만드는 세포내 기관을 억제해 암세포를 죽이는 1세대 세포 독성 항암제는 1990년대에 개발된 것으로, 현재에는 표적항암제, 면역항암제 등 3세대 항암제까지 쓰고 있다. 펜벤다졸은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효과가 없는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설명했음에도 말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믿지 않고 펜벤다졸을 먹는 것은 개인적인 자유이다. 믿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의견을 밝힌 것’이라는 의심을 가지는 것까지도 개인적인 자유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문가의 의견에 대해 별달리 반박할 점이 없으면서도 이러한 근거 없는 의심을 확산시키는 것은, 무익한 논쟁을 유발함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극히 부적절한 행위이다.

법관이 고심 끝에 내린 판결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온라인에서 난도질하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이다. 의사나 법관 같이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권위조차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부정하고 공격함으로써 발생한 사회적 부작용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함께 섞여 사는 사회는 공기와 같아서, 내가 숨쉬는 것과 네가 숨쉬는 것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권위주의와 무권위주의는 동의어가 아니다. 부디 새해에는 전문가의 의견이 정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상식적인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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