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구, 아흔 아홉
구십구, 아흔 아홉
  • 유형준
  • 승인 2019.12.1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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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99)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일백을 가리키는 한자 ‘백(百)’에서 한 일(一) 글자를 빼면 흰 백(白)이 되므로 아흔 아홉 살을 ‘백수(白壽)’라 부른다. 아흔 아홉, 구십구. 아라비아 숫자로 99.
숫자 99는 우리에게 주는 상징성은 무엇인가? 다양한 해석이 있다. ‘가득하지만 꽉 채우지 못한.’, ‘부럽지만 완전치 못한 불만 욕심.’ 사람은 상징을 통해 -상당 부분 작위적으로 만듦- 철학적 확장과 상승을 꾀하거나 누릴 수 있다. 문득, 99타령을 늘어놓는다.

-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창시절 의료서클[요새 말로 동아리] 중에 구구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여러 의대, 간호대, 치대생들이 모여 진료 봉사도 하고, 서로 의견과 정보를 나누는 활발한 모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구, 99라고 이름 지었을까. 그 이유가 그럴듯했다.

100을 완전 숫자로 본다면, 사람들이 모여 짜내는 모든 궁리와 행위, 특히 의료부문에서는 기막힌 용을 쓰더라도 100점 만점일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9자를 두 개 겹쳐 구구회라 작명했다고 한다.
멀고도 넓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을 곁눈질로 얼핏 보기만 해도 이승의 모든 일이 기껏해야 구십구임을 생각하며 모임의 명칭을 짓지 않았을까.

어쩌면 숫자를 깨우치기 시작하는 어릴 적에 사람의 분수를 알라고 구구단을 닦달하며 외우게 한다는 점을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어느 한 ‘99’ 는 미국의 유명 뮤직 그룹 토토(Toto)가 불러 빌보드 차트에 올랐던 노래 제목이다.
1971년에 개봉된 조지 루커스(George Lucas) 감독의 사회공상과학 영화 ‘THX-1138’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노래로, 사람이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미래 시대를 상상한 영화다. 노래 가사의 첫 부분을 번역하여 옮긴다. 여기서 ‘99’는 등장하는 여자 이름이다.

‘99 / 너무 오래 기다려 왔어 / 아 99 / 우리는 어디로 잘못 갔나요 / 아 99 / 사랑해’ 2050년을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 ‘99’는 1971년 개봉했으니 첫선을 보인지 이미 48년이 지났다.
그리고 앞으로 31년 남았다. 그 즈음엔 모든 게 번호화 되어 있을까? 기왕에 숫자로 불리던 나이는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표시한다면, 늙음은 어떤 번호로 불릴까?

특히 너의 늙음과 나의 늙음은 어떤 기호로 표기할까? 달력 나이에 주름살 개수와 깊이를 숫자로 병기할까? 아니면 허리 굽은 각도나 보행 속도나 악력을 숫자로 보태어 부를까? 혹여 열심히 소망하면 31년은 더 못살까?
‘아흔 아홉 살까지 살 것이다 / 나는 / 몇 권의 책을 / 더 읽고 // 저녁이면 / 아내와 함께 / 늙은 포도주 향내를 마시고 // 소스라치듯 새벽에 깨어나 / 몇 줄의 그리운 시 쓸 것이다 // 사람에 가까운 사람의 / 마지막 그림자가 될 것이다 //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 자주 몸서리칠 것이다.’라는 정성수 시인의 몸서리를 흉내 내면 그만큼이야 더 못살까? 궁금하다.

- 오만 원권 지폐 뒷면의 그림은 두 그림이 겹쳐 있다. 둘 중에 배경은 바람을 맞고 있는 풍죽(風竹)으로 이정(李霆)의 그림이다.
풍죽도 앞에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 매화가지 끝에 보름달이 걸려 있는 ‘월매도(月梅圖)’는 어몽룡(魚夢龍)의 작품이다. 풍죽은 어려움과 부정한 유혹에도 부러지면 부러지지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는 꿋꿋함이다.
매화가지 끝의 둥근달은 ‘매초상월(梅梢上月)’로 이 매초상월의 중국어 발음과 거의 비슷한 ‘미수상락(眉壽上樂)’으로 읽는다. 눈썹이 세도록 오래 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삶의 질도 좋다는 뜻이다.

오만 원 지폐엔 ‘올바르게 살아 아름답고 건강한 늙음을 누리’는 데에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살면, 아니 좀 더 정확히 일러, 이렇게 살며 늙을 수 있는 이들만이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도학자 소옹의 ‘희로음(喜老吟)’이 휘날리는 늙음의 기쁨 한 갈피라도 부여잡고 늙어가지 않을까. ‘실처럼 수염 희도록 사는 이 그 몇인가? 어찌 구구하게 백발을 뽑으랴? 세상 높은 벼슬 못한다 해도 인간사 벗어나 오히려 많은 것 알 수 있네. 따스한 봄 시원한 가을 기다려 동으로 서로 놀러가고 배 타러 가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밭도 있으니 시골 늙은이 얼굴에 언제나 기쁨.’

-‘이름 모를 들풀에 명칭이 붙여지는 순간 그 풀은 야생화가 아니다.’라는 말에 여전히 동감하고 있다.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오늘 처음으로 단 한 번 경험하고 마는 오늘의 늙음. 이 늙음에 명칭을 붙이는 일이 야생화에 이름 달아주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늙음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늙음은 일상이 된다. 늙음에 이름 붙여 주는 과정 또한 일상이다.

그렇다면, 늙음과 상관한 현상들을 문자로든 숫자로든 명칭화하면 일상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늙음의 본디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라면 더 이상 보탤 게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구체적 이유를 들추어내려면 지나온 세파의 바람과 대나무와 매화가지와 그 세파를 내려다 본 보름달들과 적어도 한 번은 상의해야 마땅하단 생각이 든다.

더욱이 늙음이 쌓이고 쌓여 거의 100을 채워갈 즈음이 된다면 그것들의 정리(情理)를 생각해서라도 더욱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그 명칭을 어떻게 발음할 지를 궁리하는 게 순서라는 생각과 함께.

예를 들면, 99를 ‘구십 구’로 읽을까, ‘아흔 아홉’으로 읽을까. ‘타령’은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거나 뇌까리는 것으로 ‘99타령’은 ‘99’에 대하여 자꾸 지껄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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