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 시대를 살면서
(기고) 이 시대를 살면서
  • 의사신문
  • 승인 2019.11.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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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역사의 수레바퀴로…”
김 인 호의사수필가협회 명예회장서울시의사회, 대한의사협회 고문한국의사시니어클럽 운영위원장
김 인 호 의사수필가협회 명예회장 서울시의사회, 대한의사협회 고문 한국의사시니어클럽 운영위원장

“이 때까지 살면서 이런 세상은 첨이야! 아들 며느리가 붙잡았지만 참을 수 없어…!”

장터 같은 왕십리역에서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누구에게 고함지르듯 중얼거리며 들어섰다. 노인석에 앉았던 대학 동기가 벌떡 일어나며 “여기 앉으시지요. 근데 웬 화가 그리 나셨습니까” 물었다. 꾸역꾸역 밀려든 승객으로 어깨가 맞닿은 열차 안은 열기로 가득 했다. “내 나이 구십이야. 너무 오래 사니 이런 꼴을 보나! 구둘 목에 앉아 멀쩡히 보고 죽을 수 없어 나왔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사기꾼 같은 사람을 판서로 앉히고 그래. 그 만큼 말리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닌가. 참을 수 없어…!” 젊은 시절 군인 장교였는지 소리가 우렁찼다. “백 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추임새 넣듯 맞받아 주니 노인은 흥분하여 열변을 토했다. 인근 승객 모두 같은 전장으로 가는 길이였기에 뚜렷한 목적을 내지른 노인의 독백에 공감하는 듯 옳소 하는 소리로 웅성웅성했다. 시청 지하철 역사는 만원이고 출구는 줄서 기다리고 밀리듯 우린 노인을 부축하며 겨우 빠져나왔다.

헤어지기 전 ”어르신! 누구와 만나기로 했나요?” 묻자 “내 친구들은 고생만 하고 이미 다 죽었소. 그들 몫까지 모아 그냥 연단 앞에 갈 거라우…” 지팡이에 의지하고 인파속으로 멀어져가는 노인의 뒷모습은 마치 패잔병 같았다. 누가 왜 인생의 끝자락에 선 저 노구를 끌고 이 집회에 참여하도록 밀어 낸 것인가. 알지 못할 울분이 솟았다. 우린 군중의 흐름을 따라 걸으며 만남의 장소를 ‘카톡’으로 타진하고 엄청난 군중의 함성을 전송하며 서로에게 놀라움을 전했다.

사실 며칠 전까지 나는 중고 동창이나 대학 동기들의 모임 요청에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이런 집회에 참여하는 부류가 정치성이 있고 자기 과시가 많았기에 밤늦은 귀가 길목에서는 항상 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식과 도덕, 인격과 정의를 외면하고 자기 가족만의 욕심으로 가득한 파렴치한 위선자를 옹호하며 옳다고 모여든 법원 앞 촛불 집회, 그것도 백만 명 이상이라는 호들갑에 피가 거꾸로 돌았다. 나는 내 역량만큼 살며 공정하게 경쟁하며 한계에 부딪히면 고민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나의  아들과 손주들에게도 정당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교육시켰다.

공정은 신뢰이고 사람 사는 사회의 질서이며 룰이다. 그것은 기원 전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간과 금수의 경계를 지은 것이다. 아무리 이념으로 갈라진 정파라 하더라도 백일하에 드러난 부정 행각에 뻔뻔히 거짓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을 잘하고 있다고 막무가내로 옹호하고, 특히 대한의학회, 병리학계 등 의료계에서 인턴고교생 제 1저자 등재 부당성으로 논문 취소 결정을 보고는 의사로서 난 내가 아는 모든 인맥을 통해 불공정에 대응하자고 설득했다. 소식을 접한 친지들 모두 “이건 아니다”며 공감했고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현장의 인파는 엄청났다. 비집고 앞으로 나갈 수 없어 대형 스크린의 주최측 성토 발언에 후렴으로 박수를 칠 도리밖에 없었다. 촛불 피로 신드롬을 비웃는 광장의 울부짖음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워낙 강경하게 나서자 “여보! 대충 하시구려. 혈압 오르면 노년의 당신만 괴롭고 위험해요”라고 한 아내의 우려 섞인 눈빛이 어른거렸다. 아내의 말대로 적극 가담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은 아무 것도 없다. 구순의 지하철 노인처럼 울분의 모임에 동참이나 할 뿐이다. 처음으로 접해 보는 인산인해 파도가 한 목소리로 출렁거린다. 군중은 이미 나라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심정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50~60대 남녀가 대부분이고 20~30대는 학생그룹 일부, 백발 노인 70~80대가 상당히 많았다.

“이순신 동상 밑에서 만나자. 어딘지 알겠지?”  확성기의 구호 외침과 웅변 소리 때문에 한 쪽 귀를 막고 고함을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인할 수 없어 몇 번을 반복했다. 교보에서 200미터 거리 임에도 한치 앞을 내딛지 못했다. 얼마 못 가서 돌아보니 동행한 대학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손을 잡고 걸어도 놓치면 인파에 휩쓸릴 정도의 밀도였다. 부산, 춘천, 원주, 분당에 사는 고교 동기들이 이미 그들끼리 합류하여 나를 찾고 있어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난리통에서 친구들과의 1여년 만의 해후는 특별했다. “부산 촌놈들아! 45년 된 이 세종문화회관을 못 찾아서 그렇게 헤매면 어쩌나?!” 만나자마자 반가움에 옛날처럼 핀잔으로 운을 떼자 “우리가 여기 올 일이 언제 있었나? 이 북새통에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이 친구야!”하며 얼싸안았다. 하기는 그들 생활에서 평생 여유롭게 이 곳을 찾을 일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오늘의 만남은 어떤 운명적 해후 같았다. 난 그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고 광화문과 북한산 배경으로 집회 인파의 소리까지 담아 동영상을 촬영해 주었다. 50년이 지난 세월은 그들을 회색빛 노인으로 만들었다. 대머리와 백발에 주름진 얼굴은 한 시대를 건너온 셈이다. 그들에게 비장한 심정으로 새벽길을 나서게 한 현실은 불확실한 미래 탓일 것이다. 그 세월을 견뎌오며 진지하게 지켜온 삶의 역사가 자칫 불공정하고 공산사회주의 세대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 공포심이 생긴 것이다. 그들 시대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노력이 그 대가를 받고 개천에서 용 나는 드라마틱한 여정의 시대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자넨 그래도 가정교사 노릇하며 갑류(甲類) 장학생 공부 벌레였기에 의사로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난 외항선을 타고 마도로스 청춘을 보냈지 않은가. 지금은 은퇴한 교장 선생 아내의 연금으로 그럭저럭 보내고 있네.” 집회를 이탈하고 경복궁 지하 선술집에 자리잡자 춘천의 S가 학창시절 후 신상과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난 특전사 중령 때, 전 대통령 청문회 석상에서 군인들을 비하한 국회에 가서 소동을 부리고 옷 벗었지. 무엇이 정의롭고 애국하는 것인지 모르는 의원들, 그들의 ‘내로남불’이 만연하여 여기까지 오게 돼 너무 열 받는 거야.” 예비역 대령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다. 우린 술잔을 부딪히며 오늘의 분위기와 정치 실종에 분개하였다. 고생했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다가 급기야는 학창시절 이웃 여고생을 두고 친구들끼리 얽힌 숨겨 왔던 첫사랑 사연까지 고백하며 밤늦게까지 웃고 울고 분개했다.

“야! 친구들아! 나라 지도자가 부산 후배 친구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저렇게 말아먹을지 몰랐다는 거야… ‘부산은 빨간 물 들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야단났다 아닌가. 난 청와대 앞에 갈 거야. 차라리 이참에 드러누울 작정이다.” 샌님 같은 P였다. 그는 한 때 나라의 녹을 먹으며 청춘을 보낸 경력이 있었지만 이렇게 강경하게 흥분할 줄은 몰랐다. 우리 모두 소름이 돋았다.
국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때 인권마저 무시하고 산업화를 밟았던 나라였다. 그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이 아직 이 시대에 살아 있다. 우리 의사 전문직도 강제의료보험제도의 저수가 국가 정책에 희생해 왔던 것은 국민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 국민을 무시하고 철면피 정치를 하는 이 시대에 누가 이 친구들을 단죄할 수 있을까. “여보게. 자네가 거기까지 나설 군번은 아니네. 자칫 제 명(命)에 못살아요. 바로 내려가시게나!”

밤늦은 지하철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긴 하루였다. 취하기도 했지만 피로가 모여들어 몸이 무겁다. “그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역사의 수레바퀴로…” 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린다. 그러나 한 달여 울분에 맺혀 쌓였던 홧병(火病)을 치유하듯, 불공정을 규탄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였다는 것, 그 아픈 세대의 순수한 옛 친구들을 만나 소회를 털어낸 것만 가지고도 오늘 하루(2019년 10월3일)는 차라리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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