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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사 12월호 낭만닥터 인터뷰(김한겸 고려대구로병원 병리학과 교수)
서울의사 12월호 낭만닥터 인터뷰(김한겸 고려대구로병원 병리학과 교수)
  • 의사신문
  • 승인 2019.11.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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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김한겸 고려대구로병원 병리학과 교수


 
사물,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김한겸 교수를 자꾸 움직이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한다. 현미경 속 미세(微細) 세상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도, 까마득한 과거 속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미라 연구도 그런 원동력에서 비롯됐다. 그뿐인가. 몽골에서 시작한 의료봉사는 이제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됐다. 김 교수에게 ‘현대판 노마드’라는 수식어가 붙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미경 아트,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

현미경을 통해 우리 몸에 세포조직을 관찰하고 병을 찾아내는 병리학자 김 교수.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현미경 속에서 단조롭게만 보였던 세포조직이 말을 거는 듯했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짠하게.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단상 덕에 그에게 ‘현미경 아트 작가’라는 타이틀이 더해졌다. 김 교수는 육안으로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많은 이들에게 꺼내 보였다. 서서히 반응이 오자 그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무한대로 뻗어나갔다. 2013년에는 바이오사진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수상작은 <흰 수염 할아버지>로 무릎관절 조직 중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일반인들이 두려워하는 암세포나 기생충도 김 교수의 손을 타면 유니크한 예술로 재탄생된다.
작품 사진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김 교수는 흔쾌히 스마트폰 사진첩을 연다. 김 교수는 수많은 작품 중 몇 가지를 보여주면서 ‘그냥 느껴보세요’라고 덧붙인다. 세포조직을 찍었다는 고정된 사실도 생각지 말라 전한다. 보이는 대로 감상하라고 조언한다. 작가가 나서서 작품을 설명하기보단 감상자가 먼저 느끼는 게 우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처음에는 그간 접해온 익숙한 미술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달라 한참을 보게 된다. 그러다 점점 감각적인 컬러가 눈길을 사로잡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것들이 보입니다. 전 이야기를 더할 뿐이죠. 처음 현미경 사진을 찍은 건 93년도쯤이었어요. 하루 종일 현미경 속 세포조직을 들여다보는 게 일상인 병리의사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자, 일하는 즐거움이 됐죠. (웃음) 그리고 세포조직은 대개 푸르거나 붉어요. 때문에 다채로운 컬러들은 보정 작업을 통해 입힌 겁니다. 제가 부여한 이야기와 어울리도록 말이죠.”
국내 최초로 현미경 사진 전시회 <NOMAD IN A SMALL WORLD>를 열었던 김 교수. 향후 그가 또 한 번 세상에 꺼내 보일 작품은 무궁무진하다. 그간 쌓아온 작품만 1만 5천여 개에 달하기 때문. 그가 전해줄 미세 세상 이야기에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고정된 틀 너머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만의 예술 영역을 확보 중인 김 교수의 작품 활동에 귀추가 주목된다.
사실 김 교수는 현미경 사진을 찍기 훨씬 전인 고등학교 때부터 사진에 대한 애정이 컸다. 현미경 사진 말고도 해외봉사지역과 모교의 풍경들을 기록하고 있다. 일반 사진전도 두 번이나 열었을 정도로 사진의 양은 방대하다. 족히 100만 장은 넘을 것이다. 그에게 사진 촬영은 이 세상을, 또 소중하고 사랑하는 곳의 면면을 사각형으로 떠놓는 일이다. 
“일하면서, 봉사하면서, 일상 속에서 사진을 찍어요. 사진은 삶의 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왜 찍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해요. 답을 얻으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죠?”
김 교수는 현미경 사진뿐만 아니라 숨 쉬는 곳에서 늘 셔터를 누를 것이다. 또 사진을 모교 달력에 제공한다던가, 전시회 수익금을 기부하는 등의 선한 영향력도 지속할 것이다. 내년 6월 중순에는 아프리카 지역을 봉사하며 촬영한 사진전을 열 계획이라니 사진작가로서의 김 교수는 더 바빠질 듯하다. 

휴머니즘 있는 미라 연구가 이뤄지길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미라 연구 권위자인 김 교수. 그가 미라 연구에 가까이 다가갔던 이유는 즐거워서, 재밌어서다. 전문 분야보다는 취미로서의 개념으로 미라를 연구해왔다. 억겁의 시간을 가로질러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호기심 많은 그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김 교수는 미비했던 미라 연구 분야에 열정을 쏟아부었고, 역사적·학문적으로 한 획을 긋는 발견을 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다.
2002년 발굴된 윤씨 모자 미라는 여인이 출산 중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숨져있어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유일무이한 형태의 미라였다. 또한 2004년 발굴된 조선시대 학봉장군 미라의 간에서 간흡충을 발견했고, 2016년 의정부시에서 발굴된 미라의 폐조직에서 폐흡충의 성충과 셀 수 없는 알이 발견됐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 질병 역사의 판도를 바꿨다.
“‘피를 토했다(객혈)’는 조선시대의 기록을 대부분 ‘결핵 때문’으로 추측했죠. 특히 객혈을 보였던 조선시대 왕들의 사망 원인을 폐결핵으로 추측해왔습니다. 하지만 영양 상태가 좋았을 왕들의 경우, 반드시 폐결핵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의정부시 미라 폐흡충을 통해 조선시대의 소중한 의학적 유산이 밝혀진 겁니다.”
김 교수는 미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에 비해 관리 시스템이 전무한 실정을 안타깝게 여긴다. 뜨거운 화제를 몰고 왔던 파평 윤씨 모자 미라조차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했다. 국가기관이 아닌 병원 해부학교실 냉동고에 보관된 상태다. 겨우 땅속에서 나온 모자 미라는 차가운 냉동고 속에 있다. 김 교수는 이집트를 대표하는 유물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은 ‘투탕카멘이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큰 것’이라고 말한다.
“깜깜한 땅속에서 벗어난 미라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미라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 시대상은 물론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죠. 그러나 더 이상 연구자들이 관리할 수 없게 되면 화장 처리되고 맙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미라가 입고 있던 옷이나 부장품에 관심이 더 커요. 앞으로는 미라 보존과 관리에 ‘휴머니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2017년 기준 우리나라 미라 발굴 현황은 59구다. 이중 35구만 보관 중이며 박물관에서 전시, 관리하는 미라는 단 3구다. 김 교수처럼 애정을 쏟는 이들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유산은 까만 재가 되어 영영 사라질 것이다.

몽골에서 아프리카까지… 글로벌 의료봉사가

김 교수하면 떠오르는 또 한 가지, 바로 ‘봉사’다. 고대생들에게 봉사하면 떠오르는 교수로 늘 지목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8년 고대사회봉사단을 창단해 학생들과 함께 해외 각지를 누볐고 수많은 학생들을 봉사자로 양성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3일이 채 되지 않았다. 장시간 인터뷰에 피곤할 법도 하나 봉사라는 화두를 던지자 다시 활기를 찾는 김 교수다.
2005년 김 교수는 몽골 고고학자들에게 미라 분석을 의뢰받았다. 칭기즈칸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최초로 발견한 사건에 한국 연구팀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온전한 기쁨을 느낄 만도 하나 김 교수의 마음은 편지 않았다. 열악했던 몽골의 의료환경이 잊히질 않아서. 또 1980년대 초 우리나라의 열악했던 의료환경이 떠올라서. 2007년 대한병리학회 이사장이 된 김 교수는 ‘몽골 의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뜻에 동참하는 이들과 함께했다. 특히 자궁경부암 조기 진단을 위한 이론, 실습 교육은 큰 역할을 했다.
“과거 우리나라도 WHO가 파견한 외국 의사들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도움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세계 최고가 된 거라고 생각해요. ‘받은 걸 돌려주자’란 마음으로 몽골을 찾았습니다. 10년 동안 몽골에서 의료 교육 위주의 봉사를 한 결과, 암 진단이 가능한 의사가 대여섯 명에서 100명 이상이 됐습니다. 이제 몽골은 자립이 가능해져 대상을 아프리카 지역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글로벌 의료봉사가로서 해외 각국을 찾는 김 교수에게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국경 없는 의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러시아 남서부의 아디게아공화국, 우간다, 피지,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 뜻이 있는 자에겐 길이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김 교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이런 자신을 ‘돌아다니는 병리 의사’라고 칭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어려서부터 선의(船醫)가 꿈이었어요. 봉사를 통해 어린 시절 꿈에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제2의 인생에 대해 늘 생각해요. 명확한 건 없지만 아프리카 지역에서 꾸준히 후학을 양성할 수 있길 바랍니다.”
김 교수는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다. 병리학자, 미라 연구자, 사진작가, 봉사가… 좀처럼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며, 선명한 발자국을 곳곳에 남긴다. 어느 곳이든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그가 가는 곳에 늘 좋은 에너지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사검도회, 전국의대생 검도대회를 만든 장본인이자 ‘공인 7단의 검객’이기도 한 김 교수는 인터뷰를 정리하며 검도에서 삶의 태도를 배운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접한 검도는 올바름과 진리를 추구하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검도로 얻은 집중력은 병리학자에게 큰 도움이 됐고요. 앞으로도 예의와 진심을 다하는 자세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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