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의사의 발견과 발명
역사를 바꾼 의사의 발견과 발명
  • 전성훈
  • 승인 2019.11.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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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60)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사람의 신체를 좀 더 건강한 상태에 가깝도록 개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대까지 발견 또는 발명된 성분, 약품 또는 물품을 최대한 이용하여 최선을 다하여 이를 위해 노력한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당대까지 발전한 과학기술을 전제로 진료에 임하지만, 의사들 중에서는 당대의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발견과 발명을 하여, 말 그대로 ‘역사를 바꾼’ 의사들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사람을 ‘살린’ 의사의 발견과, 사람을 ‘잡은’ 의사의 발명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씩만을 소개해 볼까 한다.

사람을 살린 의사의 발견으로 한 가지만 꼽는다면, 물론 엄청나게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페니실린의 발견을 들고 싶다(x-ray의 발견 역시 사람을 살린 위대한 발견이지만, 발견자가 의사가 아닌 물리학자이므로 제외).
페니실린(penicillin)은 최초의 항생제이다. 푸른곰팡이로 불리는 Penicillium notatum와 Penicillium chrysogenum에서 얻을 수 있고, 대표적인 베타-락탐계열 항생제이다. 1928년 영국 런던 성모병원(St. Mary‘s Hospital) 의과대학에서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의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와 독일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이 유효 물질을 분리.정제했다.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은 세렌디피티(연구과정에서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으나 매우 귀중한 발견을 우연히 해낸 것)의 대표적인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플레밍이 포도상구균 계통의 화농균을 연구하던 중, 게으른 성격 탓에 배양접시들을 방치하고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한 개의 배양접시에만 녹색의 곰팡이가 피어 있었던 것을 보고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분리.정제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임상실험을 했으나 실패를 거듭했고, 유의미한 효과를 검증하지 못한 플레밍은 결국 4년만에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 1932년 이후에는 그와 관련된 연구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묻힐 뻔한 페니실린을 세상 밖으로 다시 끄집어낸 사람은 플로리와 체인이었다. 그들은 항균물질을 연구하던 중 플레밍의 이전 논문을 접하고 그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결국 1940년 페니실린을 순수하게 분리하는데 성공했고 치료제로서의 페니실린 효과까지 검증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연구 성공 역시 세렌디피티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실험동물로 모르모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르모트 대신 생쥐를 대상으로 실험하여 페니실린의 효과를 검증했다. 그런데 페니실린은 모르모트에게는 독성을 띄기 때문에, 당대에 흔히 하는 방식대로 모르모트를 사용했다면 효과 검증 실험은 실패했을 것이다. 역시 위대한 업적에도 ‘운빨’은 필수인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을 ‘잡은’ 의사의 이 발명에는 ‘운빨’이 없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 의하여 요청되고, 발명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단두대(guillotine).
프랑스대혁명 당시 파리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조세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는 1789년 삼부회에 평민대표로 참석하여 ‘처형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방법으로,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고 인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동의한 국민의회(삼부회에서 변경)는 1792년 ‘정형외과 아카데미’의 사무총장으로서 수많은 외과 의료기구를 발명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던 외과의사 앙뚜완 루이에게 개발을 의뢰했다. 이렇게 하여 1792년 4월 25일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단두대가 파리 혁명 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마치 단두대의 발명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듬해인 1793년부터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고, 단두대는 미친 듯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793년 1월에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필두로 하여,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샤를로트 코르테, 오를레앙 공, 뒤 바리 백작부인 등이 단두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1794년에는 공포정치를 진두지휘한 로베스피에르도 목이 날아갔고, 혁명 광장에서만 1,343명의 목을 자르고서 공포정치의 종료와 함께 단두대는 광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후 단두대 공개처형은 1939년의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이 마지막이었지만, 이후로도 ‘비공개’로 계속 집행되다가, 1977년 마지막 단두대 처형이 있었다. 그리고 1981년 프랑스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사실 이 사람 잡는 발명은 의사로서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개발된 것이다. 이전의 사형집행방법은 천차만별이기는 하였으나 공통의 목적은 하나 같이 사형수의 고통을 극대화하여 대중이 이를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역시 사람을 ‘살린’ 의사의 발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의료계에는 탁월한 아이디어로 유의미한 발명을 이뤄낸 의사들이 수없이 많다. ‘휴대용 시청형 청진기’ 등 무려 57개의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는 이병훈 의협 고문, 줄기세포 기술과 관련된 여러 의료기기를 개발한 메디칸 주식회사 이희영 대표, ‘기관 삽관 이중 튜브’를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한 장경술 가톨릭대 교수, 전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패혈증 진단 기술인 ‘델타뉴트로필 인덱스’를 개발한 이종욱 건양대 교수, ‘초음파 프로브 일체형 주사장치’를 개발한 손문호 원장 등 수많은 의사 발명가들이 있다.

아쉬운 점은, 의료는 전세계적이고 공통적인 업무기준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의사의 의료적 발명은 막대한 의료시장을 개척할 첫 단추가 됨에도 불구에도, 기업과 정부의 지원 및 유인책은 신약개발 부문 이외에는 충분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 의사들보다 창의적이고 재주 많은 우리나라 의사들이 ‘역사를 바꾼’ 발명을 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가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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