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관(達觀)의 걸음
달관(達觀)의 걸음
  • 유형준
  • 승인 2019.10.0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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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91)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대충 밟는 일이 없으시다. 선생님과 함께 걷거나 몇 발치에서 걷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이는 선생님의 걸음새가 흐트러짐 없이 알찬 것을 알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온전하게 꾹꾹 지르밟는다.

의학적으로 올바른 보행이란 에너지를 지나치지 않게 소모하며 몸에 피로를 쌓지 않는 걸음걸이로 성인의 경우 1분에 100보 내외를 걷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하면 체중 1kg당 1m를 걸어가는 데 0.8칼로리쯤 소모된다. 올바로 걷는 사람의 신발 바닥을 살펴보면 바깥쪽 발꿈치가 먼저 닿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곳이 체중이 제일 먼저 옮겨지는 곳이 까닭이다. 발을 내딛어 바닥에 닿을 때 가장 먼저 발꿈치가 닿아 신체에 미치는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잘 걷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바람이 몸을 밀어 준다는 기분으로 리드미컬하고 안정감 있는 보행이라고 한다. 걸으면서 몸무게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물결무늬를 그리듯 출렁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선생님은 의학적 건강 보행을 약간 느린 속도로 딛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보다 단단하다.

이처럼 단단하게 걷는 것은 아마 천성적으로 타고나신 답지(踏地)법일 것 같기는 하나 천성만큼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걸음걸이에 쏟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기는 근거가 있다. 하나는 시문학비 답사를 올바로 제대로 하기 위해 연습하셨을 가능성이다.

-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을 바라는 마음으로 돌을 쌓아 올리고, 돌을 세우고, 그리고 그 돌에 새기는 것은, 하늘과 자연과 신 가까이 이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의 한 표현이다. 그 바람을 쌓아 올리고 돌을 세우고, 그리고 그 돌에 새기는 것을 비婢 또는 탑塔이라 한다. (중략) 시인으로서의 극진한 애정과 이해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말을 돌에 새기고 간 선배 시인의 석비(石碑)를 찾아보는 것은, 사승자(史乘者)로 사는 후배시인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일은 저널리즘이 만드는 어떤 종류의 쇼와도 무관한 채, 누구도 구차해서 미워놓은 일을 끈질기게 마무리 짓는 어쩌면 영원을 간절히 생각하는 사람의 전형석인 한 모습일는지도 모른다.(1997년 1월, [함동선의 문학비 답사기] 책머리에) -

질척거림을 혐오하시는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고약함을 벗어나기 위해 사승자로서 도리를 마무리 지을 걷는 연습을 독하게 하셨을 것이다.

둘째 근거는 선생님의 시 속에 들어 있다. “가슴에서 / 머리로 가는 긴 여행이다.” ‘시(詩)’전문 (시집 ‘밤섬의 숲’) 답사도 여행의 하나일진대 시집 서문에 발레리를 인용 한 것같이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이라” 어차피 문학은 발 밟기가 바탕임을 ‘시(詩)’에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음을 살필 때 선생님은 여행, 답사를 위해 특유의 진지함으로 연단(鍊鍛)하셨다고 짐작하는 것이 오히려 그럴듯하다.

선생님의 걸음새를 생각하고 짐작한 기간은 짧지 않다. 간접적이긴 하나 처음 선생님을 대한 것은 함동선의 ‘문학비 답사기’를 읽으면서였다. 그전에도 간간히 문학계를 서성이다가 또는 함께 [문학예술] 동인 작업을 하는 선생님의 자부이신 윤 시인을 통해 선생님의 함자를 보고나 들은 적은 있었지만 “처음에는 신경 써 가면서 처세를 해야 하는 고약한 우리의 문학 풍토에서 초연하고 싶은 소일거리로 시비를 찾았던 것이, 돌은 대하면서 그 돌의 변하지 않는 모습과 신비성에 끌려 미친 사람이 된”(함동선의 ‘문학비 답사기’) 답사기를 읽어 가면서 선생님의 흔들림 없는 문학비 같은 의지와 차가운 돌비석에서 환생한 시인의 체온을 대하면서 문학비를 찾아 먼 길을 오갔을 걸음을 생각하고 하였다.

그 후 선생님의 걸음을 직접 뵌 것은 지난 4월 19일 토요일이었다. 이상기온으로 여름다운 봄이었던 더우면서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뜨락예술문학회의 문학기행에 선생님을 초청하여 남산의 김소월 시비와 조지훈 시비를 찾았다. 뜨락 동인회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소월 시비와 지훈 시비를 찾아가는 선생님의 찬찬한 걸음은 처음 ‘문학비 답사기’를 읽었던 때의 인상과 같았다. 하나도 변치 않은, 세월이 길이로 전연 쌓이지 않은, 끝까지 마무리 짓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 세월 대신에 자리하여 걸음은 하나하나가 발 크기만 한 문학비를 땅에 놓아 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의 걸음걸이는 소월과 지운의 시비 앞에서 찬찬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문학비 강설은 해설의 수준을 넘어 시가 새겨진 돌에 생명 의지를 붙어 넣어주는 듯 차마 질문을 할 용기조차 가질 수 없었다. 돌비석을 감정이 흐르는 광물로 변화시켜가는 조화(造化) 앞에서 선생님의 걸음은 의학적 완벽으로만 이를 수 없는 달관(達觀)의 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과 건강 등을 감안하여 걸음걸이를 분류해 보면 활력형, 족음(足音)유발형, 일보일보(一步一步)형, 조급형, 허세형, 위축형 그리고 산만형이 있다. 선생님의 걸음을 이 분류로 굳이 가른다면 일보일보형에 속한다. 이 걸음걸이는 다음의 걸음을 예측할 수 있어 함께 걷기에도 옆에서 보기에도 안정되어 보이고 무리가 없다. 만사도 그렇게 다루어 믿고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건조함이 있으나 일단 신뢰하여 심중을 내면 한없이 깊어진다. 건강 역시 하나하나 축적되어 세월이 쌓일수록 점차 강건해진다. 그러나 선생님의 걸음을 일보일보형이라고만 하기엔 다소 미흡하다. 따라서 선생님의 걸음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걸음 형태를 짓는다면 달관일보형(達觀一步型)이 합당할 것이다.

발은 신체의 한 부분이면서 머리와 가슴을 공간적으로 이동케 하는 걸음 그 자체이고 또한 개체 생명의 전체성을 지닌 해 여행과 답사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걸음같이 시를 쓰며 문학비를 답사하며. 걸음 그 자체로 시인으로서의 극진한 애정과 이해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말을 발자국으로 놓으며. 언제고 돌아갈 ‘핏줄 땡기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는 걸음 연습을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또박또박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팔순을 맞으신 선생님의 더욱 건강한 달관의 일보일보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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