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자살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자살에 대한 몇 가지 고찰
  • 전성훈
  • 승인 2019.10.02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53)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생물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생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생존 자체가 목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생존에 각기 나름의 목적을 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생존의 목적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경우 생존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자살하는 동물이다.
자살의 정의는 비교적 명확하다. 세계보건기구는 자살을 ‘죽음의 의도와 동기를 인식하면서 자신에게 손상을 입혀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원시시대에는 자살에 대한 평가 자체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업혁명과 함께 인간이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노동집약적인 농업형태가 확립되자, 노동력의 확보는 모든 사회지배층의 핵심 과제가 되었고, 자살은 사회적.도덕적으로 비난받기 시작했다.
기독교, 이슬람교 등 유사한 시기에 정립된 세계종교들은 사회지배층의 이러한 의도를 수용하여 기존 경전의 해석을 확장하거나 율법에 추가하여 자살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종교들의 성립 초기에는 사회가 ‘자살금지’에 큰 관심이 없었음은, 십계명에 자살금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에 이르러 자살에 대한 비난과 제재가 사회적으로 확립되었다. 자살자의 시체는 공동묘지가 아닌 도시 외곽에 비석 없이 홀로 매장되었고, 자살자의 전재산은 몰수되었다. 기독교 색채가 짙은 단테의 ‘신곡’을 보면 종교적 평가 역시 알 수 있는데, 신곡 중 지옥편에는 자살한 영혼은 지옥에 떨어져서 지옥의 8층 ‘폭력’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점점 썩어가는 고목나무가 되어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유교의 영향으로 자살을 부모에 대한 최악의 불효로 인식하여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자살은 크게 비난하지 않았는데, 따라서 자신이 목숨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여주거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한 이른바 명예자살이 빈번하게 있었다.

18세기 들어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화가 진행되자 자살을 단순히 개인을 비난하는 수준에서 다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세기 이후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자살자를 심신상실자(실성한 사람)로 보는 이론이 우세했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대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밀 뒤르켐의 영향으로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사회와의 관계에 따라 자살할 수 있다는 이론이 힘을 얻게 되었는데, 뒤르켐은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따라 자살의 유형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론적 자살의 4가지로 나누었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로, 이 경우의 자살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에 불만족하여 하는 자살을 들 수 있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적 유대가 지나치게 강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로, 순장, 자폭테러, 종교적 집단자살 등을 들 수 있다.

사람은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통제가 있을 때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통제가 너무 약할 경우 예측불가능성과 불안정성에 따른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는데, 이에 따른 자살이 아노미적 자살이다. 대표적으로 실직한 가장의 자살을 들 수 있다.

반대로 사회적 통제가 너무 강할 경우 압박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이에 따른 자살이 숙명론적 자살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낄 때 마지막 탈출 수단으로서 자살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극단적 빈곤이 지속되는 상황이나 계층이동 사다리가 완전히 막힌 경우의 자살을 들 수 있다. 즉 뒤르켐의 결론은 개인의 사회적 유대가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해도, 사회적 통제가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해도 자살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들을 거쳐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법적으로 자살자에 대한 제재들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우리 법은 자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권리로 인정하는가, 범죄로 처벌하는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범죄로 다루는 것에 가깝다. 다만 현행법상으로는 ‘도넛’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 본인은 처벌하지 않지만, 그 주변에서 그에 가담하거나 조력한 사람은 처벌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4일 발표한 2018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18년 자살사망자는 13,670명으로 2017년보다 1,207명, 약 9.7% 증가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6.6명으로 2017년보다 약 9.5% 증가했다(참고적으로 1990년에는 7.6명이었다). 경제적으로 이전보다 풍요해진 것은 사실이고 그에 힘입어 복지수준 역시 이전보다 개선되어 가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계속 가파르게 높아지는 추세이다.

우리의 복지제도가 개선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나, OECD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노인자살율, 몇 년 전에 있었던 송파 세모녀 사건 등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또한 다른 연령대의 자살 역시 문제이지만,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점은 심각한 문제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올해 초 서울시의사회는 서울시교육청과 업무협약을 맺고, 정신건강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서울시 학생들 약 3,000명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전문적 지원을 약속했다. 자살 방지를 위해 정부기관이 전문가들에게 올바르게 조력을 요청한 사례라는 점에서 서울시교육청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앞으로 다른 정부기관들이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의사들을 껄끄러워 하여 다른 단체에게 조력을 요청하는 기묘한(?) 시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서울시의사회의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노력들이 우리나라를 ‘자살대국’의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한걸음이 될 것으로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