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깎이
손톱깎이
  • 유형준
  • 승인 2019.10.0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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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90)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노안이 온 걸 알아차리는 상황은 다양하다. 책이나 신문을 읽는데 초점 맞추기가 어려워 눈을 찡그리고 눈이 쉬이 피로하면서 두통이 온다. 작은 글씨를 읽기 힘들다. 괜스레 어두워져 더 밝은 조명을 찾는다. 이 같은 각양각색의 경우에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손톱 발톱을 깎다가 노안이 찾아옴을 발견하는 이가 적지 않다. 늘 써오던 손톱깎이가 손에 설어지기 시작하면서 시나브로 큰 손톱깎이가 더 편해진다. 더 나이 들어 손아귀 힘이 쇠해지고 관절 협동도 헝클어지기 시작하면 남의 도움이 아쉬워진다.

이 십 수 년 전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를 챙겼다. 국내외에서 모인 육 남매가 어머니의 신실한 기도수첩, 아버지의 돋보기안경과 펜으로 쓰신 서신 등을 각각 주섬주섬했다. 한동안 생각 후에 아버지의 한자로 새긴 상아(象牙) 인감과 등나무 지팡이, 그리고 부모님이 함께 쓰시던 손톱깎이를 집에 가져왔다. 개중에 검지 손가락만한 길이와 볼륨의 손톱깎이는 기능이 촘촘하면서도 시원시원하여 손톱과 발톱을 원하는 대로 부모님의 손발톱을 깎아드렸었다. 게다가 목숨도 튼튼하고 길어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나 다름없이 시원 촘촘한 역할을 아직도 넉넉히 해내고 있다.

손톱은 하루에 0.1 밀리미터에서 0.15 밀리미터씩 자란다. 물론 나이 부위 계절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외부에 노출될 위험이 가장 높은 가운데 손가락 손톱이 가장 빨리 자라고, 위험이 가장 낮은 엄지손가락 손톱의 자라는 속도가 제일 늦다. 발톱은 이곳저곳 쓰임새가 많은 손톱보다 두 배 정도 느리게 자란다. 어쩌면 손발톱은 세월이 쌓이는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는 여러 징표들 중의 하나에 은근히  속할 것이다. 일정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멀리 지방에 사시는 누님은 집에 들러 부모님의 손발톱을 자르고 깎고 정성껏 정돈하곤 했다.

누님은 성품대로 매우 정확한 기간 간격을 두고 왔었기 때문에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누님의 방문은 달력을 대신 할 정도였다. 구름 한적한 어느 날, 어김없는 누님의 정성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심정을 노래한 적이 있다.
‘세월은 손톱처럼 자란다. 어제까지 길이와 오늘까지 길이가 자란만큼 다르다. 땅에 누워 살면 흙보다 까매지고 구름에 얹혀살면 구름보다 가벼워진다. 손톱을 자를 때마다 청자 비늘 벗겨지듯 세월은 떼어지고 세월은 손톱도 아닌데 손톱처럼 자란다’- 유담,‘손톱’ 전문 

이러한 연유로, 손톱깎이는 부모님뿐 아니라 누님의 마음 때가 새겨져 있다. 전쟁 통에 피난길 곳곳에 놓여 있던 독한 자극과 위험에 노출 되어 몇 배나 빨리 자랐었을 부모님의 손발톱이 화석처럼 박혀있다. 마치 가신 분의 모발과 양손발톱을 잘라 좌우를 구분해서 담는 다섯 개의 작고 붉은 오낭(五囊)처럼 기억의 화석을 담고 있다. 세월 따라 육신은 늙어 손발톱의 성장 속도는 느려지고 손과 발은 쪼그라들어. 깎기를 마치고 저녁을 차려 놓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환히 웃으며 항상 건네는 말. “건조하지 않게 크림 자주 발라드려라.” 어머님 가시기 바로 전 날에도, 아버님 떠나가시기 사흘 전에도 누님의 환한 음성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그 후로 세월이 제법 쌓였다. 정년퇴직 후 대화가 넉넉한 직장으로 자리도 옮겼고 딸도 바다 건너 이국으로 시집을 갔고. 그래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몇 가지 중의 하나가 손톱깎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금요일 저녁에 치르는 세월 다듬기 의식(儀式). ‘손톱처럼 자란’ 세월을 다듬으면서 손과 발이 닿았던 인물과 사물들을 떠올리노라면 추상(追想)은 어느새 부모님의 회초리처럼 마른 손발을 꼬옥 잡고 있다. 백발(白髮)의 아들 꼭 끌어안아 침묵하실 회초리. 시인 이승하 교수의 시가 가슴속에서 가만히 박동친다.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일혼 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 바람은/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첫 울음소리//이 발로 아장아장/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이 발로 폴짝폴짝/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뼈마디를 덮은 살가죽/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굳은살이 덮인 발바닥/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발톱을 깎을 힘이 없는/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린다/가만히 계세요 어머니/잘못하면 다쳐요/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맞닿은 창문이/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어머니에게 안기어/일혼 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이승하,‘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전문

유품은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다. 등나무 지팡이는 책상의 오른쪽 책꽂이 바로 곁에, 상아 인감은 책상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 서랍 속 왼쪽 뒤에, 쉰을 바라보는 손톱깎이는 안방에 딸린 아내의 화장대 왼쪽 맨 위 서랍 속 오른쪽에 놓여 있다. 손톱깎이는 온 가족의 공용으로,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제자리에 되놓여진다. 부모님 떠나신 뒤로도 쉬지 않고 오랜 세월 제 몫을 다 하느라 맞물리는 이가 약간 무디어졌지만, 지금도 큰 고장 없이 가족들의 세월을 듬쑥히 손질해 주고 있다. 오래전 부모님의 늙음을 공손히 다듬어 드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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