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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때 해볼 걸
아, 그때 해볼 걸
  • 유형준
  • 승인 2019.09.25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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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89)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서 교수 별장 가꾸기, 김 원장 제주 살이, 장 원장 도시 사이클, 진 원장 분재, 박 회장 원예, 이 원장 자동차 레이싱, 윤 박사 한시 감상…’

오늘 하루 카톡 단톡방에 올라온 대학 동기 동창들의 근황이다.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교육을 받고 또 동일한 시대의 수십년간 의업에 종사하다가 사회적 약속으로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동기들의 변화된 삶에 흥미와 대견함을 느끼는 일은 당연하다. 그 동안 분주함에 전념하느라 미루고 미루었던 오랜 아쉬움을 실행으로 옮겨 즐거움을 짓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모드 뮬러(Maud Muller)’는 미국에서 롱펠로우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1892)의 시다. 110행에 달하는 긴 시의 줄거리를 요약한다.

- 어느 여름 날, 아름다운 모드 뮬러는 건초를 수확하다가 지방 도시에서 온 판사를 만난다. 서로에게 반한다. 판사는 자신이 모드 뮬러와 결혼하여 현지 농부가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부유한 판사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도 이러한 생각을 고백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가고 판사는 그의 부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다. 모드 뮬러는 교육받지 않은 젊은 농부와 결혼한다. 남은 생애 동안 둘은 각자 그들이 만났던 날들을 기억하며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깊은 후회 속에 회고한다. -

서로 좋아했지만 부(富), 교육 수준, 사회적 신분 등의 제약으로 고백하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이어갔다. 세월은 어김없이 쌓이고, 늙음을 맞아 모든 제약의 굴레를 벗어나 마음껏 할 수 있는 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는 아쉬운 후회뿐. 두 사람의 삶을 바라본 시인 휘티어는 그 후회를 이 시와 시인 휘티어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명구(名句)를 넣어 노래한다.
‘신이시여, 두 연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소서, / 젊은 날의 꿈을 헛되이 회상하는; / 모든 슬픈 말이나 글 중에서, / 가장 슬픈 건: “아, 그때 해볼 걸!”’
(God pity them both! and pity us all, / Who vainly the dreams of youth recall; / For of all sad words of tongue or pen, / The saddest are these: “It might have been!”)

인용한 시구 중에서 마지막 행이 그 명구다. ‘가장 슬픈 건: “아, 그때 해볼걸!”’ 여기서 ‘It might have been!’은 해석이 구구하다. 필자는 ‘아, 그때 해볼 걸’로 의역했지만 오역(誤譯)의 두려움이 적지 않아, ‘그랬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좀더 소극적 의미일수도 있겠다는 개인 의견을 보탠다.

휘티어의 ‘모드 뮬러’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사람은 휘티어의 후배 시인이며 단편소설가 브렛 하트(Bret Harte)다. 하트는 ‘젠킨스 판사 부인(Mrs. Judge Jenkins)’이란 제목으로 ‘모드 뮬러’를 패러디 한 짧은 시를 발표한다. 아마 짐작컨대 브렛 하트는 두 사람이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산다’고 전제하여 패러디를 꾸몄을 것이다. 그의 패러디에서 모드 뮬러는 결국 판사와 결혼하게 되어, 모드 뮬러의 친척들은 결혼식에서 술에 취하고, 모드 뮬러 자신은 쌍둥이를 낳은 후 ‘퍼지고 불그레해지고 뚱뚱해진다’. 차차  두 사람 모두 결혼을 후회하게 된다. 모드 뮬러는 남편 판사에게서 지루한 지식이 가득함을 발견하고, 남편은 모드 뮬러의 세련미 없는 사교 예절에 불만을 품는다.

‘패러디’는 ‘본디’를 돋보이게 한다. 본디 시를 뒤틀어 쓴 브렛 하트의 패러디 대로 하고 싶은 말 다하며 그들의 삶이 꾸려졌어도 ‘가장 슬픈 말’은 역시 ‘그때 해볼 걸!’이리라. 할 말 다하고, 고백할 말 다 하고 살아도 아쉬운 후회는 남는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두고두고 생각하며 한탄하는 행위가 후회다. 후회는 아쉬움과 동행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아쉬워 후회한들 현재의 삶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내일, 미래에는 영향을 준다. 일이 일어난 직후 만큼 절절하진 않더라도 얼마간의 아쉬움이라도 마음 속에 출렁인다면, 스쳐가는  아쉬움으로 잠시라도 후회한다면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휘티어는 ‘모드 뮬러’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아! 우리 모두에게 달콤한 희망이 있다 / 사람 눈 속에 깊이 묻힌 채 //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 천사들은 /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 치우리라!’[천사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는 건 부활, 부흥, 중흥 등을 의미한다-필자 주]

의학의 동기들이 늙음의 동기가 되어 점점 더 익숙하게 늙어가는 지금. 만약 의업에 몰두했던 지난 삶들을 패러디로 재구성한다면 스토리 전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디든 패러디든 전개의 처음과 끝을 관통했고 현재도 작동하고 있는 한 가지만은 결코 변할 수없음을 필자는 안다. 다름아닌, 치열함이다. 그렇다고 들썩이고 나대는 치열함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 마음 속에 - 때론 고황(膏황) 깊숙이 - 넣어둔채 묵묵히 가는 치열함이다. 그래서 본디 치열했고, 패러디 속에서도 맹렬했고, 아쉬움도 후회도 그리고 현재의 늙음도 묵묵함 속에 치열하다.

할 말 다 못하고 산 모드 뮬러의 가장 슬픈 말, ‘아, 그때 해볼 걸’ 즐거운 메시지로 바꾸어 올리는 동기들의 묵묵한 치열함에 사족을 단다. ‘휘티어는 생애의 대부분을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 및 자선 단체에 십삼만 사천 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이승에서의 여든 다섯 해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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