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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발견의 의미
블랙홀 발견의 의미
  • 정준기
  • 승인 2019.09.10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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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15)
정준기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블랙홀이 발견된 사실이 정 선생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올해가 구순(九旬)이신 B 교수님이 물어 보셨다. 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1930년에 출생한 교수님은 젊으실 때부터 뛰어 난 두뇌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전설 같은 많은 일을 하셨다. 진단방사선과학과 핵의학을 전공하면서 19 권의 책자와 수많은 중요한 논문을 만드셨다. 내 전공인 핵의학 분야만 설명하면 1980년대 중반에 미국핵의학회와 학회 잡지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논문을 발표하셨다. 대학을 정년퇴임하신 후에도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현업에 종사하시면서 학문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다.
우리 학회의 시니어 몇 명이 B 교수님과 정기적으로 저녁식사 모임을 가지고 있다. 교수님께 핵의학이 아닌 인생사에 관해 배우고 생각하는 유익한 기회였다. 교수님은 의학 외에도 철학, 역사, 음악, 언어학 등 다양한 형이상학적 주제에도 자신 만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 보다도 지성인으로 이 시대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 주고 계신다.

지난번 모임에서 여쭈어 보신 이 질문은 나에게 화두(話頭)가 되었다. 처음에는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여겼지만, 생각할수록 내 생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니 주어야 하는 사건이었다.

다음은 올해 4월 10일자 국내 언론사 기사의 종합이다.
“국제 연구진이 이론으로 추정만 해온 블랙홀의 실제 모습과 크기, 무게를 실측하는데 성공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 제안한 블랙홀은 강력한 밀도와 중력으로 인해 빛, 에너지, 물질, 입자의 어느 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을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인정받고 있었지만 빛마저 빨아들이는 강한 중력 탓에 인류는 그동안 블랙홀을 볼 수가 없었다. 이번 촬영 역시 블랙홀 본체가 아니라 블랙홀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해지는 경계면인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주위에 맴도는 빛을 통해 블랙홀의 윤곽을 관측한 것이다.

쉐퍼드 도에레만 박사를 단장으로 한 전세계 2백여 명의 천문학자로 구성된 블랙홀 관측 프로젝트팀은 지구 곳곳의 거대한 망원경 8대를 연결시켜 지구 크기의 가상 망원경을 만들었다. 가상 망원경은 미국의 허블 천체망원경보다 1000배 이상 해상도가 높다.
처음으로 실체가 밝혀진 블랙홀은 지구에서 5천5백만 광년 떨어진 은하 M87 중심부에 있고 수 많은 블랙홀 중 초대형이면서 지구에서 가까운 것이다. 태양 질량의 65억 배 무게, 지름은 160억 km에 달하는 크기로 도넛 모양의 노란 빛 가운데 검은 원형인 모습이다. 아인슈타인 박사의 예측이 연구팀 측정 자료와 정교하게 일치된다고 발표했다.

이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100여년 만에 입증됐다는 사실을 넘어서, 과학계에 새 지평을 열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단지 시작일뿐으로, 우주 형성과 진화의 비밀을 여는데 한 발 더 다가서게 됐다.”
우선 나에게는 블랙홀 관측을 위한 기획과 준비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계산 결과 블랙홀 실체를 관측하려면 지구 크기의 망원경이 필요했다.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아주 새로운 발상으로 해결하였다. 지구 곳곳에 있는 대형 망원경 8대를 연결해 지구 크기 규모의 거대 가상 망원경을 만든 것이다. 아마도 각 개별 망원경의 영상 정보를 지역 위치 정보와 함께 컴퓨터에 입력하고 일종의 역 투사 방법으로 계산해 영상을 얻었을 것 같다. 비슷한 개념을 이용한 핵의학 단층 영상 기기도 있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이 영상을 얻기 위해 200여명의 연구진이 수 년간 슈퍼컴퓨터로 계산, 분석해야 했다.
 
블랙홀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는 빅뱅의 이론과 맞물려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법칙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지구,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이나 무작위가 아닌 어떤 법칙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 인간의 생(生)과 사(死)의 법칙에도 관여한다. 블랙홀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없어진다.”는 존재에 관한 가장 근본적 해답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라지면 결국은 다시 나온다. 물론 완전히 아주 다르게 해체되고 아주 다르게 조합된 상태로.

천체과학자의 예측에 의하면 약 30억년 뒤에는 태양이 폭발하고 지구는 여기에 흡수되어 태양계를 비롯한 수 많은 별들이 블랙홀로 흡수되어 사라질 것이다. 광활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조그마한 지구에서 겨우 200만년 전에 나타난 인간이 수십 억년 뒤 일을 예측하고 걱정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계속 탐구한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의 특징적 습성일지 모르겠다.

죽음과 소멸은 새로운 탄생이기 마련이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블랙홀처럼 끌어 들이기만 하는 세계가 있으면, 반드시 물질이 그 내부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내뿜기만 하는 세계인 ‘화이트홀(white hole)’이 존재한다고 한다. 150억년 전의 대폭발이 재현되거나 또는 화이트홀에서 신생 성운이 만들어 지고 우주는 새로운 희망을 시험한다. 높은 온도와 고 방사능 아래에서 물질의 다양한 조합으로 원시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해 우리 인류가 남긴 문명을 이어가는 우연한 기적도 상상해 본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이 삶의 의미일 지도 모른다.”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말이다. “죽음은 삶의 시작이요 희망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제 철학과 종교는 블랙홀이라는 뜻하지 않던 미지의 군부대와 마주 친 것이다. 아군일까, 또는 적군일까? 그러나 우리 보다 2~3 천년 전에 살았던 세계 종교 창시자의 지식, 이념, 통찰력과 믿음 만으로는 현재 밝혀진 또 앞으로 더 밝혀질 사실을 충분히 해석하고 대처하지 못할 것이 우려된다. 또 다른 정신적 이념적인 변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분야에 식견이 없으니, 답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버거운 숙제이다. B 교수님은 어떤 멋진 생각을 하실까?

그러자, 자기 생각이 없이 답을 구순의 교수님에게 기대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다시 한번 각성하며 학계의 어른으로 여전히 우리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계시는 B 교수님에게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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