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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까지 살다가 93세에 죽다
83세까지 살다가 93세에 죽다
  • 유형준
  • 승인 2019.09.04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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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87)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1994년 11월, 여든 세 살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담화문을 통해 발표했다.

“친애하는 미국민 여러분, 저는 최근에 제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미국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낸시와 나는 이 사실을 우리의 비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후 십 년간 투병하다가 아흔세 살에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십 년에 대한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족과 주변의 친지들, 또한 모든 언론들이 그의 최소한의 존엄을 정성껏 간직해 준 배려였다.

지난 달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OECD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꾸준히 늘어나 2017년 기준 여자 85.7세, 남자 79.7세로 평균 82.4세다. 기대수명은 신생아가 몇 살까지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나이다.
한편 질병과 부상으로 고통받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건강수명은 남자 64.7세, 여자 65.2세로 평균 64.9세에 지나지 않는다. 기대수명과 17.5년 차이가 난다. 이는 노후의 십칠 년 반은 아픈 상태로 지낸다는 뜻이다. 성별로 보면, 여자의 기대수명이 85.7세이고 건강수명이 65.2세니까 병으로 고생하는 기간이 20.2년, 남자는 건강수명이 64.7세이므로 병치레 하는 기간이 14.6년으로 상대적으로 여자가 유병 기간이 길다. 특기할 점은 기대수명 대비 건강수명의 비율이 78.8 퍼센트로 이 통계를 처음 작성한 2012년의 81.2 퍼센트보다 2.4 퍼센트 포인트 줄었다. 더 오래 살지만 아프게 사는 기간이 더 길어졌다.

또한, 흥미로운 통계는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건강기대수명이 68.5년으로 건강수명보다 3.6년 더 길다는 사실이다. 실제 아픈 상태인데도 주관적으로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기간이 3.6년이란 뜻이다.
고령사회에서 건강한 늙음은 개인의 단순한 질병관리로만 구할 수 없다. 건강수명이라는 숫자로 표시되는 건강한 늙음은 노인들이 자립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면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건강을 잘 유지할 기회를 보장하는 과정의 충실한 열매다. 따라서 건강한 늙음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강과 사회참여, 안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그 과정은 각 개인과 사회 양쪽 모두에 적용되어야 한다.

즉, 질병의 치료만이 아니라 행복한 늙음의 질에 의학적 실행의 목표가 두어져야 한다(윤종률, HIRA 정책동향 2016). 이를 위해서 노년기 자립생활을 방해하는 각종 생활기능 위험성을 미리 파악하고 이에 대한 예방노력을 지역밀착형으로 고안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국가차원의 정기 건강검진이 활발히 시행되고 있다. 그 활발에 노년기 특성에 맞는 건강문제와 기능장애 문제, 그리고 노쇠 발생 여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도록 검진항목을 재조정하여 적용하고 그에 따라 각 개인별 특성에 따른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보탠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만성적인 건강문제와 그에 따르는 합병증이나 기능장애 발생을 관리하는 것이 아급성기 또는 급성기후 의료 서비스에 대한 관련 분야들이 협력하는 기획과 실행이 필요하다. 한 연구 보고에 의하면 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독립성의 상실과 시설 입소라고 한다. 아울러 최근 시도를 시작한 말기의료에 대한 표준지침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여 고비 고비를 매듭지어 크게 3막으로 나누기도 한다. 제1막은 출생에서 결혼까지, 제2막은 사회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맞을 때까지, 그리고 제3막은 은퇴 후 죽을 때까지다. 과거엔 각 막의 공연 시간이 대략 25년 이었지만, 평균수명이 늘어난 요즈음엔 한 막의 상연 시간을 30년으로 본다. 상연시간이 총 90년이다. 연극이 끝나기까지 다이내믹하게 열연을 하다가 별안간 순간적으로 종막이 내려지는 극은 없다. 만약에 그런 시나리오의 연극이라면 우리네 수명 속에는 건강 수명만 들어있고 건강하지 못한 유병(有病)수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의 전개와 무관하게 사고가 나거나 제 맘대로 스스로 마감을 하는 경우를 빼놓곤 그럴 수 없다. 어차피 수명엔 건강과 유병이 함께 자리하고 있고, 늙음엔 건강수명보다 유병수명이 더 길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이 함께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바람직한 늙음이다. 물론 바람일 뿐이다.

치매 환자임을 공표한 직후 레이건은 그의 아내인 낸시와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함께 치매 치료 연구를 위한 로날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를 창설하였다. 건강수명을 마감하고 치매에 시달릴 ‘치매 수명’ 십 년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으며 발표했던 담화문의 끝 부분을 다시 본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었던 큰 영광을 준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언제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조국의 장래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지니고 떠날 겁니다. 이제 나는 황혼기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가 여행했던 황혼의 십 년을 건강하지 않은 수명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품격있게 정리한 그의 치열했던 수명을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83세까지 살다가 93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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