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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사 9월호 낭만닥터 인터뷰(김지선 맘편한내과의원 원장)
서울의사 9월호 낭만닥터 인터뷰(김지선 맘편한내과의원 원장)
  • 하경대 기자
  • 승인 2019.08.22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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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든, 봉사든, 글이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김지선 맘편한내과의원 원장


김 원장은 따뜻한 소재로 만든 유리잔 같다. 차가운 물을 담아도 이내 따뜻하게 데워주는. 특히 맑고 투명한 유리처럼 그 속에 담고 있는 진심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사람이다. 작고 가녀린 그의 체구는 단단한 사물과 부딪히면 쉽게 깨지는 유리의 약점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오랜 벗이었던 책과 함께 길고 긴 담금질의 시간을 거친 그는 더 강해질 준비를 마쳤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였던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의사로서의 꿈, 작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고자….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고3 엄마가 된 후에야 다시 글을 쓰게 됐어요.
 이제부터는 다양한 도전을 하고 싶고, 책도 쓰고 싶어요”

김 원장의 부친은 딸이 국문과에 진학해 교사가 되길 바랐다. 어려서부터 연필과 종이만 있어도 혼자 잘 놀던 딸의 모습이 참 좋아서, 내내 마음에 남았나 보다. 모친 또한 김 원장이 초등학교 때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하면 무척이나 기특해했다. 읽고 쓰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재능을 보이던 딸이 이과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부모는 내심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김 원장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책과 글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 공백은 환자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채워갔다. 하지만 본과 1학년 때 그는 크게 흔들렸다. 해부학 실습, 치열한 경쟁… 김 원장은 견디기 힘든 고비와 마주했다. 잊고 살던 책 냄새가 그리워졌고, 국문과에 재입학해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고민하는 제게 어떤 선배가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원하던 길은 아니었지만 여러 이유로 선택되어진 길이 더 최선의 길일 수 있다’고요. 책이 그립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니 ‘책은 여기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고 특히 작가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는데, 의사로서의 경험은 좋은 자양분이 될 거’라고…. 며칠 후 우연히 꿈을 꿨는데 제가 의사를 못 하는 상황에 놓였어요. 꿈속에서 엄청 울더라고요. 의사의 끈을 놓치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다시 마음을 잡은 김 원장은 꿋꿋하게 의대 교육을 마쳤고, 의사의 길을 걸었다. 결혼과 개원 생활을 하면서는 더욱 살기 바빠졌다. 의사이자 누군가의 아내, 엄마에게 글 쓸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감성에 빠질 시간은 당연히 없었고, 일기조차 못쓰겠더란다. 그런 그가 글을 쓰게 된 건 작년부터다.
“작년에 첫째 아이가 고3이었어요. 아는 분들은 공감할 텐데 고3 엄마는 항상 대기조예요. 아이 스케줄에 내 모든 걸 맞춰야 하죠. 어느 순간부터 상실감이랄까. ‘나도 우리 부모님의 귀한 딸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 수능 때까지 잡념을 없앨 프로젝트가 필요했어요. 가슴이 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거더라고요.”

마침 서울시의사회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밤 10시에 둘째를 재우고,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첫째를 픽업하는 새벽 2시까지 김 원장은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입상했다. 용기가 생긴 그는 한미수필문학상에도 도전했고, 우수상이란 값진 결과를 얻었다. <커피>라는 제목의 수필은 작고한 모친에 대한 이야기다. 모친을 떠나보낸 후 김 원장은 라디오나 TV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올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무 괴로워서 도망치듯 외국에 1년 동안 나가 있기도 했어요. 엄마에 대한 생각도 아예 봉인해버렸죠. 어느 날인가 ‘이 이야기를 털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고, ‘써보자’는 결심이 섰어요. <커피>를 다시 읽으면 감정 절제를 못 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해요. 그래도 오랜만에 감정 표현에 적당한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써 내려갔던 순간들이 좋았어요.”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는 치열한 삶을 충실히 버텨왔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숨통을 트이게 해준 건 책이 유일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김 원장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다.
“전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한 후 감당이 되겠다 싶으면 도전하는 타입이에요. 그 덕에 피해간 위험도 있지만, 너무 조심히 살아온 것 같아요. (웃음) 오늘이 내가 살아있는 날 중 가장 젊은 날이잖아요?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란 말을 남기기도 했고요. 이제는 할까 말까 망설이기보다는 뭐든 도전하고 싶어요.”

시대의 변화로 책이나 잡지, 신문 매체가 E-Book으로 전환되는 요즘이 김 원장은 그리 달갑지 않다. 책 냄새를 좋아하는 그는 답답할 때면 서점에 가서 2~3시간 시간을 보낸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거기서?’라고 의아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래도 김 원장은 책 냄새는 물론 종이의 촉감, 인쇄된 활자들이 주는 안정감을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환기한다. 

특히 소설을 주로 읽는다는 그의 독서량은 한 달 평균 5~6권이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 피에르 르메트르의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 등은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김 원장은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독서할 때 감명 깊은 문장에 줄을 치고 곱씹어 본다는 그는 ‘나중에 짐이 되더라도 책은 꼭 사는 편’이라며 웃는다. 
“의사 선생님들마다 취미생활이 있을 테지만, 특히 독서는 돈도 적게 들고 무한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요즘엔 책과 관련된 팟캐스트가 다양해서 구독을 통해 전문가들에게 내게 맞는 책을 추천받을 수 있어요. 그렇게 추천받아서 인터넷 서점 카트 안에 담은 책이 벌써 200여 권이 넘네요. 읽는 속도보다 카트에 넣는 속도가 빠르지만… (웃음) 한 권씩 주문해서 배송될 때 가장 설레요.”

김 원장은 독서는 본인처럼 활동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최고의 취미라고 말한다. 책은 나와 다른 세계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길이며, 그 안에는 가보지 못한 나라, 살아보지 못한 삶, 엿보고 싶은 일상… 모든 것들이 있다고 덧붙인다.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책을 통해 메꾸고 도전하는 삶의 태도를 품고 김 원장은 다양한 경험을 해나가려 한다. 언젠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꿈도 다시 품었다.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꽤 궁금해진다.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자유로워진다면
 의사로서 꿈꿨던 것들을 이루고 싶어요”

김 원장은 2003년부터 2015년까지의 개원 생활을 접고 외국에 다녀온 뒤 재작년부터 남편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현재는 오전 진료만 본다.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부럽게 느낄 수 있지만, 그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않다. 의사 가운을 벗고 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하고, 부수적인 가사 일이 일상의 중심인 김 원장. 일은 열심히 한 만큼 성과가 나타나고, 보람도 있지만 가사 일은 영 표가 안 나기 마련이다. 더욱이 자녀는 부모 뜻대로 되는 법이 없다.
“아직 둘째가 중학생이라 케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정에 조금 더 무게를 두려고 해요. 사실 제일 속 편할 때는 진료실에 있는 시간이에요. (웃음) 12년 동안의 개원 생활을 떠올려보면 좋은 순간도 있었지만 아찔한 순간이 먼저 떠올라요.”

개원 초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개원가에서 디클로페낙(다른 약물에 비해 효과가 좋지만, 환자에 따라 부작용이 동반될 수도 있다)이라는 진통소염제 주사를 쓰는 일이 빈번했다. 어느 날 환자가 몸이 너무 아프다고 호소하길래, 잘 치료하고 싶은 마음에 김 원장은 디클로페낙 주사를 처방했다. 환자를 돌려보낸 지 10분쯤 지났을까. 진료실 문을 열고 환자가 다시 들어왔다. 이내 ‘선생님, 저 너무 어지러워요’라는 말과 함께 김 원장의 눈앞에서 푹 쓰러졌다. 무척이나 놀란 김 원장은 간호사와 함께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마우스 투 마우스를 시행하는 순간에는 의대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고 ‘내 의사 인생은 끝났구나’ 두려움이 밀려왔다. 오전 내내 환자에게 전력을 쏟은 결과,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고 회복했다. 그러나 당시 보호자의 원망스러운 눈빛은 여전히 김 원장의 가슴에 남았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부작용이었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요. ‘개원가에서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요. 다른 개원가 선생님들에게도 그런 사례가 종종 있길래 디클로페낙 사용을 지양하자는 권유를 많이 했어요. 환자를 도우려는 선한 의도였는데 오해받으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다시 기회가 왔으니 더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의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어요.”

이 일은 김 원장이 개원 생활을 하면서 지칠 때마다 버티는 힘이 됐다. 이후 김 원장의 소신과 방향성을 믿고 따르는 환자들이 긴 시간 그와 함께했다.
긴 수련과 경쟁 속에서 결혼, 출산, 육아, 병원 운영을 경험한 김 원장. 이제 막 50대에 들어선 그가 여의사로서 걸어온 길을 천천히 되짚어보니 20·30세대 여성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를 부탁하자 김 원장은 어느 때보다 단단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인턴 때 교수님께서 ‘너희들 절대 남자 의사 앞에서 울지 말고 힘들단 얘기하지 마’, ‘밤새 열이 나서 끙끙 대도 약 잘 챙겨 먹고 아침엔 거뜬히 출근해라’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그래야 남성들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다고요. 당시 여의사들은 그렇게 버텨냈어요. 특히 여성 전공의들은 임신, 출산과 마주하게 돼요. 이에 대한 처우 개선도 중요하지만, 결국 여성 후배들이 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수련 시간의 부재, 다른 동기들에게 쏠리는 업무 과중 등의 문제는 분명 있을 테니까요.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것이 여의사가 인정받고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김 원장은 후배들이 부디 의사로서의 소신과 꿈을 이뤄나가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 또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오래전부터 꿈꿨던 의사로서의 모습을 실현해나가고자 한다. 김 원장은 외국인 진료센터에서 일하거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을 하고파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김 원장의 모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삶이 궁금해요. 진료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연과 애환을 들어보고 싶어요. 케이스가 모이면 한데 묶어 책을 펴내고 싶기도 해요. (웃음) 또 젊어서 봉사를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봉사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죠. 아이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지고, 여유가 생긴다면 꼭 이루고 싶어요.”

진료든, 봉사든, 글이든, 어떤 형태로든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는 것… 김 원장의 최종 목표이자 꿈이다.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삶, 그가 꿈꾸는 아름다운 인생 2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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