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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쇼팽 4개의 스케르초
프레데리크 쇼팽 4개의 스케르초
  • 오재원
  • 승인 2019.08.12 09: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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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481)

■ 삶 그 자체가 농담이지만 농담은 치명적일 수 있다
 이탈리아어 ‘스케르초(scherzo)’는 본래 ‘농담’, ‘해학’이라는 뜻이다.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작품번호 33-2에서 ‘미뉴에트’ 악장 대신 도입한 ‘스케르초’ 이래 여러 악장의 소나타나 교향곡 그리고 실내악 등에서 한 악장으로 등장하였다. 가볍고 사소하고 별 의미 없는 농담, 말장난 같다는 원뜻이 음악에서는 급격한 기분 변화, 변덕스런 성격을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쇼팽은 단순히 고전주의 악장의 사용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4개의 스케르초를 작곡하였다. 이렇듯 쇼팽이 4개의 스케르초를 한 편의 완결된 서사로 자립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단순히 그 형식에 낭만주의적인 감성을 불어넣어 독립시켰다는데 있지 않고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자신의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첫 장편소설 ‘농담’에서 소설 내용과 스케르초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명시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이 4명이라는 점은 쇼팽의 4곡의 스케르초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소설의 배경은 구소련 스탈린 시절의 체코슬로바키아이다. 주인공 루드빅은 당국의 사상교육 연수에 간 여자 친구 마르케타로부터 기다리던 편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그리움이나 애틋함보다는 교육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지식한 태도에 마음이 상한 루드빅은 비꼬는 듯한 정치적 농담만 몇 마디 적은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을 당국에 고발해버리자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면서 강제노역을 겸한 군 생활을 겪게 된다. ‘농담’ 한마디에 인생이 완전히 꼬인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농담이지만 뜻하지 않게 어이없는 부조리를 낳기도 한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있는 소설이다. 이런 맥락에서 쇼팽의 ‘스케르초’는 하이든의 ‘음악적 농담’보다는 ‘삶은 그 자체가 농담이지만, 그 농담은 삶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쿤데라식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쇼팽의 첫 스케르초가 탄생한 배경이 그러했다. 1830년 그는 폴란드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바르샤바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지만 러시아의 개입으로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귀국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음악으로 애국의 길을 찾으라며 만류하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단지 사건의 경과를 타향에서 전해들을 수 있을 뿐 고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하였다. 이런 ‘농담’같은 상황은 이들 4개의 스케르초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즉 쇼팽의 ‘스케르초’는 우울, 반항, 절망감, 격한 분노와 열정, 조소적인 모멸감이 내포된 정수의 음악이다.

 △No.1 in B minor, Op.20 Presto con fuoco 비명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화음과 함께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음형이 상승하고 있을 뿐, 뚜렷한 선율은 없어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런 혼란스러움 안에서 마치 농담하는 듯 순간순간 등장하는 멜로디도 인상적이지만 곡 자체가 주는 분위기가 어두워 블랙조크와 같다. 전반적으로 변덕스러움이 뚜렷하게 드러난 첫 번째 주제 이후 제2주제는 푸근한 서정성이라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인상을 전해준다. 얼마 후 시작할 때 들렸던 고음부의 급작스러운 화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제1주제로 넘어가면서 괴팍함과 불안정성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제2주제로 몰입이 한창 무르익는 순간 날카롭게 울리는 화음은 더 깊은 비명소리를 연상시킨다. 이어지는 종결부는 짧고 깔끔하면서도 강렬하다.

 △No.2 in B-flat minor, Op. 31 Presto 곡 처음부터 힘과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연주된다. 곡 시작부분의 선율 이후 넘어가는 부분에서 충분히 거친 농담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오히려 완급을 조절한다는 기분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저음부의 악센트와 박자들로 인해 민속적인 느낌이 깔려드는 신선하면서도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다시 과거를 회고하는 듯 나긋한 화음과 함께 시작하면서 멜로디로 이어지기 위한 꾸밈음이 무척 인상적이다. 마지막에서 힘차고 아름답게 연주되던 선율은 다시금 민족적인 느낌으로 화려하게 종결을 맺는다.

 △No.3 in C sharp minor, Op. 39 Presto con fuoco 시작부터 전운이 감돈다. 격렬한 양손 옥타브와 함께 등장하며 사납게 진행되면서 중반부로 접어들면 전반부와 대조적인 뉘앙스를 풍기면서 느리고 서정적으로 깔리는 저음부의 멜로디는 무척 로맨틱하다. 이 로맨틱 분위기에 양손 하향 멜로디는 마치 눈꽃이 사르르 떨어지는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어서 서정적이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양손 상승 아르페지오를 통해서 완전히 몽환적인 딴 세상으로 이끌어가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주는 폭력성은 쇼팽의 스케르초들 중 가장 강렬하게 폭발한다.

 △No.4 in E major, Op. 54 Presto 쇼팽의 창작욕구가 폭발한 시기에 작곡된 작품이다. 시작부터 아주 차분하게 진행하면서 회고적이다. 옛날 일들을 회상하다가 점차 감정이 격해지는 방향으로 곡이 진행된다. 곡의 감정 선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클라이맥스에서는 다시 조용히 음이 치고 올라오다 절정으로 치닫는데 마치 일출을 보는 듯 해피엔딩으로 끝맺음을 한다.

 ■ 들을 만한 음반 : △샹송 프랑수아(피아노)(EMI, 1955)△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피아노)(Melodiya, 1977)△아르투르 루빈스타인(피아노)(RCA, 1959)△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DG, 1974)△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피아노)(Decca,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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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2020-09-16 15:16:52
재미있는 기사 감사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