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라이트 그림 ‘노인과 죽음’의 알레고리
조셉 라이트 그림 ‘노인과 죽음’의 알레고리
  • 유형준
  • 승인 2019.08.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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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84)
유형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형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영국의 화가 조셉 라이트(Joseph Wright, 1734~1797)의 작품 중에 ‘노인과 죽음’이 있다. 두 주인공 중의 노인은 노인으로 죽음은 해골로 그려져 있다.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 또는 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와 우의(寓意), 알레고리다. 노인과 죽음에 대해 조셉 라이트가 빗대어 놓은 암시를 나름대로 풀어본다.

한 노인이 구불구불 흐르는 강가에서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다. 세월을 굽이굽이 흐르는 강으로 대신하는 건 흔한 방법이다. 맑은 날의 강변이라면 젊은이는 풀이나 꽃을 따거나 모을 것이다. 노인은 대신에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묶고 있다. 노인은 정성을 다하여 나뭇가지를 줍고 모아 묶는 데에 몰입하고 있다. 몰입 탓에 주위를 의식하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이 뚜렷한 노인. 청색 상의를 입고 강변에 일하러 나온 그의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은 평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죽음의 접근에 더 놀라고 있다. 마치 간간이 생각나던 친구가 어느 날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을 순간의 표정과 몸짓으로.

조셉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장면의 시점이 환한 한 낮이라는 점이다.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노인도 꼿꼿이 서서 두 손을 벌리고 마치 “자, 이리 오게나.”라고 말하듯이 다가서는 해골도 모두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멀리 하늘은 맑아 푸르기까지 하고, 배경의 나무들도 곧고 싱싱하다. 다만 죽음의 알레고리를 너무 의식했는지 노인과 해골의 바로 주변은 어둡게 그림자 처리를 하고, 바로 뒤편의 건물은 무너뜨리고 쓰러트려 그려놓았다. 여하튼 대낮에, 일상에 충실하고 있는 노인에게 죽음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두운 밤에만 죽음이 오지 않는다. 다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잊고 사는 게 일상일 뿐이다. 망각하고 있더라도 늙음도 죽음도 일상에 온다. 날마다 일상이고, 생로병사가 일상이다. 모두 일상이라는 비유를 화가는 강조하여 나타내고 싶지 않았을까.

늙음 그리고 죽음에 관한 망각이 차지하는 일상의 상징화는 문학에서도 심심찮게 만난다. 영국의 역사학자 팻테인은 그 일상의 상징화를 가장 문학적으로 묘사한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등장하는 자크의 대사라고 주장한다. 자크의 대사다.

“여섯 번째 시기는 슬리퍼를 신은 여윈 늙은이로 변한다. 콧등에 안경을 걸치고 옆구리에는 쌈지를 차고 있으며 젊은 시절 아껴두었던 홀태바지[통이 좁은 바지:필자 주]가 시든 정강이에는 너무나 넓다. 사내다운 우렁찬 목소리는 어린애 목소리로 되돌아가 빽빽거리는 피리 소리를 낸다. 이 기이하고 파란만장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또 한 번 어린애가 되는 것, 오로지 망각이다. 이는 빠지고, 눈은 멀고, 입맛도 떨어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노년의 역사’/팻테인 엮음/안병직 옮김> 셰익스피어는 자크의 목소리를 빌려 인생을 말하고 있다. 인생을 하나의 무대로 비유하여 일생의 한 무대를 독백하고 있다. 자크에게 사람은 연극 배우이며 나고 죽음은 입구와 출구다. 유아기, 아동기, 연애기, 출세와 명예를 좆는 욕망의 군인기, 늙어가며 육신은 예전 같지 않지만 경험의 가치를 발휘하는 정의기. 노년기, 그리고 연극 무대가 막을 내리는 고령기 등의 일곱 시기 중에서 자크의 독백 시기는 여섯 째 시기인 노년기다. 물론 노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이 독백에는 날카로운 알레고리가 들어 있어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나이 들고 기력이 쇠해지는 시기에 들어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할 정도로 활력적인 자크를 내세워 셰익스피어는 늙음과 사라짐이라는 일상에 대한 생각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조셉 라이트의 그림을 본다. 노인이 입고 있는 웃옷의 청색에 눈길을 준다. 청색은 만물 생성의 색깔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한다. 배경의 푸른 하늘과 함께 끈질기게 함께 보인다. 마치 청색 하늘의 작은 한 자락이 떨어져 내려와 노인의 상반신에 덧입혀진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주 조금만 그림에서 뒤로 물러나 그림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면, 그림 오른쪽은 여전히 밝은 파랑색 하늘인데 반해 죽음 앞에서 당혹 속에 움찔거리고 있는 노인의 옷은 그림자 속에 어둡고 짙은 청색으로 변하고 있다. 필시 빛의 성질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조셉 라이트의 세미한 구상이리라. 한 노인의 어두운 당혹과 절망과는 무관하게 하늘은 변함없이 파랗게 빛나고 있다. 황급히 왼손을 내뻗어 다가서는 죽음을 막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오른 손은 삶의 현실인 나뭇가지 다발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다. 이 역시 일상이다.

언뜻 최초의 한글 시조로도 잘 알려진 우탁 선생의 ‘탄로가’가 생각난다. ‘한손에 막대기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했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백발가’로도 불리는 탄로가의 한 수다. 우탁 선생은 이퇴계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고 존경했던 고려말의 성리학자다. 대학자는 자연적 일상인 늙음을 제 힘과 의지로 막아보고 싶다는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흡사 그림 속 노인이 팔을 뻗어 해골과 거리를 떼어두려 하듯이.

사람은 죽음을 의식하고 염려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대처하며 삶을 꾸려 죽음에 도달한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단회성의 사건이다. 더구나 결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 절대적 고유적 사건이다. 죽음은 삶의 지평에 놓여 있는 당연한 순차적 과정이며 저 하늘의 색깔과 청명도와는 거의 관계없이 스스로의 경과다. 한 번쯤 하늘색을 닮을 순 있지만 다만 내 옷 색깔은 나에게 입혀진 조셉 라이트와 같은 화가가 자신의 알레고리로 칠해 놓은- 파란만장한 내 옷의 고유 색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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