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을 판소리하다
늙음을 판소리하다
  • 유형준
  • 승인 2019.07.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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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81)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오래 전 일이다. 모임을 마치고 판소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판소리를 잘 아는 이의 지청구가 늘어진 적이 있다. 함께 한 사람들이 판소리 추임새를 넣을 줄도 모르면서 판소리를 듣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당장 판소리 관련 책을 두 권이나 샀다. 최동현이 지은 ‘판소리 이야기’와 이규섭이 엮은 ‘판소리 답사기행’이다. 세월이 하얗게 쌓여가는 요즈음, 그 책을 다시 꺼내어 읽을 줄이야.

단가는 보통의 삶 속에서 낯익은 현상을 끌어들여 서로의 이해와 소통의 공감을 진하게 하려고 보편적 정서로 바꾸어 목청을 시용하여 서술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듣기에 편하고 비교적 차분한 평조나 우조에 호흡이 급하지 않은 중모리 장단을 쓰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중모리는 조금 느린 4분의 12박 장단 - 필자 주]. 특히 늙음을 주제로 한 ‘한로가(恨老歌)’와 ‘백발가’를 부르는 명창의 소리는 시김새[가락이 잘 삭고 익어서 예술적 멋이 가득함]가 좋고 그늘[소리의 바탕에 거느리는 여유와 심오함]이 웅숭하기 그지없다.

먼저 ‘한로가(恨老歌)’다. 한 글자라도 소홀하면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명창의 소리를 거의 그대로 옮긴다. 속으로라도 소리를 내어 따라 읽어보자.

“인간 세상을 하직하고, 양안수명(兩眼壽命)허여 운림처사(雲林處士) 뜻을 두고, 초당의 책력(冊曆)이 없어 철 가는 줄을 모르오매, 인간 화초 무성허면 춘절(春節)인가 짐작허고, 녹음방초 성림(盛林)허면 하절(夏節)로 생각하고, 천수만수(千樹萬樹) 단풍들면 추절(秋節)인가 생각허고, 송죽 백설이 흩날리면 동절(冬節)로 생각하고, 삼순(三旬) 일순식(一旬食)을 먹으나 못 먹으나 진심이 가이없고, 운심부지(雲深不地) 깊은 곳에 채약(採藥)이나 일을 삼고, 산간에 고기를 낚기 주야로 일삼어도, 아니 늙지는 못할레라. 늙기가 더욱 섧다. 어와, 청춘 소년들아. 백발 보고 웃들 마소.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다. 무정 세월 여류(如流)하야 원수 백발 돌아오니, 없던 망령 절로 난다. 망령이라 흉을 보고, 구속구속 웃는 모양 애닯고도 설은지고 절통하고 분하고나.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홍안백발 늙어간다. 인간의 이 공도(公道)를 어느 누라 막을쏘냐. 춘초(春草)난 연년록(年年綠)이나 왕손은 귀불귀(歸不歸)라.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든 못하느니. 인간 백년을 다 살아야,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 근심을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우리 인생들은 어찌 이리 애가 많나. 초로 같은 우리 인생은 아차 한번 죽어지면, 육진장포 일곱 매를 상하를 질끈 묶어 소방산 대뜰 위에 떵그렇게 올려 매고, 북망산으로 돌아들어 사토로 집 삼고, 송죽으로 거울을 삼아, 두견 접동 벗이 되니, 산은 첩첩, 밤은 깊은데 처량헌게 인생 넋이로구나. 자손이 늘어서 평토제(坪土祭)를 지낼 제, 어동육서 홍동백서 좌포우혜로 늘어놓고 칠팔촌 강근 친척, 처자공 자식공 제절하에 늘어 엎져 앙천통곡(仰天痛哭) 울음을 울 적, 자는 듯이 홀로 누웠으니 먹는 줄을 아느냐. 에, 굶는 줄을 뉘가 알 수가 있느냐. 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가 불여생전(不如生前)에 일배주(一盃酒)로구나. 살았을 적에 먹고 쓰고 놀고 헐 일을 허며 놀아 보세.”
늙음을 한탄하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깨우쳐 할 일하며 놀기를 권하고 있다.
이번엔, ‘백발가’ 가사를 본다.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중에서 명창들이 주로 부르는 가사를 택한다. 역시 한 구절 한 구절 소리내어 읽어보자.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우산에 지는 해는 제나라 경공의 눈물이로구나. 분수추풍곡은 한무제의 설움이라. 장하도다. 백이 숙제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採薇)하다가 아사를 한들 초로 같은 우리 인생들은 이를 어이 알겠느냐! 야야 친구들아 승지강산(勝地江山) 구경가자. 금강산 들어가니 처처에 경산(景山)이요 곳곳마다 경개로구나. 계산파무울차아(稽山罷霧鬱嵯峨) 산은 층층 높아 있고 경수무풍야자파(鏡水無風也自波) 물은 술렁 깊었네. 그 산을 들어가니 조그마한 암자 하나 있는데 여러 중들이 모여들어 재맞이 하느라고 어떤 중은 낙관 쓰고 어떤 중은 법관 쓰고 또 어떤 중은 다래몽둥 큰 북채를 양손에다가 쥐고 북을 두리둥둥 목탁 따그락 뚝딱 죽비는 쫘르르르르 칠 적에 탁자 우에 늙은 노승 하나 가사착복을 어스러지게 메고 꾸붓꾸붓 예불을 하니 연사모종(煙寺暮鍾)이라 허는 데로구나. 거드렁거리고 놀아 보세.”

‘우산’은 중국 산동성의 산이고, ‘분수추풍곡은 한무제의 설움이라’는 중국 한나라의 무제가 분수 강가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고사를 의미한다. ‘계산파무울차아’는 자욱한 안개도 산이 높고 험하여 산에 머무름을, ‘경수무풍야자파’는 거울과 같이 맑은 물에 바람은 없는데 물결이 스스로 일어남이고, ‘연사모종’은 안개 낀 절에서 해질 무렵 종소리가 들려옴을 묘사 한 것이다. ‘백발가’역시 흰머리를 탄식하면서도 명승명산을 다니다가 한 암자에 들러 해질녘 종소리를 들으며 맺는다.

두 단가 모두 늙음이 머리 색깔까지 바꾸며 온몸을 덮어 지배하니 서글프지만, 세상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좋다고 인정한다. 그러하니 더 부지런히 살고 더 알차게 즐기기를 노래한다. 하기야 늙음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귀불귀(歸不歸)이니 판소리 단가가 제시하는 정답에 고개를 끄덕일 밖에. 명창의 ‘백발가’에 어설픈 추임새를 넣으며 ‘변신’이란 소설로 잘 알려진 프란츠 카프카의 한 마디를 떠올린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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