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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혈 두드리기, 주술을 과학으로 둔갑시킨 정부에 개탄
‘경혈 두드리기, 주술을 과학으로 둔갑시킨 정부에 개탄
  • 의사신문
  • 승인 2019.07.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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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란 과학이론을 적용하여 사물을 인간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기술은 과학에 근거를 두고, 합리적 효용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더구나 ‘의료기술’은 그 적용대상이 인간이기에 반드시 안정성과 유효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불안정하거나 효과가 의심스러운 의료기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국민건강상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의 책무이며, 그러기에 ‘신의료기술’의 인정을 국가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5일, 감정자유기법(속칭 경혈 두드리기)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환자를 대상으로 한 안전하고 유효한 신의료기술로 인정한다고 예고하였다. 이 기법의 내용은 ‘여러 문장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러 경혈점들을 두들긴 후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노래 1구절을 흥얼거리다가 숫자를 센다’이다. 정말로 이게 전부다. 직접 따라해 봐도 의료행위라기보다는 요행을 기대하는 주술행위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신의료기술로 인정하려 한다.

신의료기술 인정에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이하 평가위원회)의 안전성 및 유효성에 대한 철저하고도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한 사례가 맘모톰(진공보조유방양성종양절제술)이다. 평가위원회는 2017년 1월 임상적 유용성을, 2018년에는 유효성을 문제 삼아 맘모톰을 신의료기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2006년 맘모톰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인정했고, 미국에서도 2007년 유방 양성종양 절제의 적응증으로 맘모톰을 인정한 바 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평가위원회의 기준이 선진국보다도 철저하고 엄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숫자를 세는 행위’를 신의료기술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

문장 말하기, 경혈 두드리기, 동공 움직이기, 노래 흥얼거리기, 숫자 세기 자체의 과학적 연관성도 의문이지만, 환자 개인의 언행이 신의료기술에 해당할 수 있는지 더욱 의문이다.

또한 시행하는 환자마다 과정과 효과가 다를 수 있으니 과정 자체가 표준화될 수 없고, 당연히 안정성과 유효성 평가도 불가능하다. 어떤 면으로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선진국에서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의료기술인 맘모톰을 평가할 때의 철저하고 엄격한 기존의 잣대는 어디로 갔는가?

합리성과 형평성 모두가 결여된 결정에 대해 수많은 비판과 우려가 쏟아지고 있고 사태는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급기야 박홍준 서울특별시의사회장은 지난 26일 열린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방문 후 기자회견에서 “감정자유기법의 신의료기술 인정은 비과학적 작태이자 세계 의료계가 개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이번 사태로 인해 PTSD 환자들이 치료시기를 놓쳐 피해를 입고, 의료비용의 무분별한 낭비가 발생한다면 해당 기관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건강한 사회로 가려면 건강한 정책이, 공정한 사회로 가려면 공정한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것도 불공정한 정책이지만, 부당한 이익을 주는 것도 불공정한 정책이다.

이번 경혈 두드리기 사태를 볼 때 정부는 생명경시 사회, 불공정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에 우리는 정부에게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과학적 근거에 근거한 공정한 정책을 펼쳐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왜냐하면 의료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내는 일이기에 한 치의 어그러짐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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