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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도 있어야 한다
'최명길'도 있어야 한다
  • 신형준 자문위원
  • 승인 2019.07.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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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총파업론'에 부쳐
신형준 의협 홍보 및 공보 자문위원-서울시 의사회 자문위원
신형준 의협 홍보 및 공보 자문위원-의사신문 자문위원

의협은 7월 2일, 오는 9~10월 의사 총파업 가능성을 정부에 경고했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 의협 옛 회관 건물 앞마당에 천막을 설치한 채 이날부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3일 오전에는 의협 사상 처음으로 ‘노천 상임이사회’가 열렸다. 이날 밤부터 매일 밤 8시 ‘의협 집행부 심야 비상(非常) 대책회의’가 열린다. ‘문재인 케어’, 더 나아가 대한민국 의료 정책의 미래를 둘러싸고 의료계가 격랑에 휩쓸린 것이다.

의사 선생님들의 고통과 분노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문케어로 곧 바닥이 날지도 모를 건보 재정, 턱없이 낮은 수가에 비해 의료 분쟁 가능성은 큰 외과계나 존폐에 놓인 산부인과 병의원 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의사가 아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의사 선생님들의 정당한 목소리마저도 ‘진찰료 30% 인상’이라는 주장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며,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시계를 잠시 400년 전으로 돌려보자.

■ 淸,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

청나라 군대는 거침이 없었다. 압록강을 건넌 지(1636년 음력 12월 10일. 이하 모두 음력.) 닷새 만(12월 14일)에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변변한 저항이 있었다면 이리 빨리 남하할 수 없었다.

왕실이 피난길에 오를 시간조차 부족한 때, 최명길은 청의 요구 조건을 듣겠다며 적진에 들어가기를 자원했다. 인조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국경을 넘은 지 닷새 만에 수도가 위협받는데도 전투는커녕 ‘강화 회담’을 요청할 정도로 조선은 무력했으니까...

정묘호란(1627년) 이후 청과의 일전을 불사하자던 그 숱한 조정 대신과 선비들의 기개는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러니 청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내내 주장했던 최명길이 나섰지.

최명길로 인해 청은 진격을 멈췄다. 대신 인조의 동생과 조정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최명길의 지연작전 덕에 왕실은 시간을 벌어 남한산성으로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다음 날인 12월 15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과천~금천(현재의 시흥)을 거쳐 강화도로 가려 했다. 몽골 침략 때도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한참을 버티지 않았던가! 눈보라가 발을 묶었다. 청 역시 조선의 전략을 이미 간파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에 병력을 배치했고. 한 달 보름 정도 이어진 남한산성 농성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남한산성으로 꽁무니를 뺐음에도 ‘말’(言)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조정 대신과 선비들은 전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최명길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이니, 목을 베야 한다는 상소도 잇따랐다.

■ 입만 산 선비 VS 병사들은 “항복하라”며 무력시위

지식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경우는 의의로 많다. 무기 한 번 들지 않았던 이들이 전쟁을 말로만 외치는 동안,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성 안에 마련된 임시 대궐 문 앞에 모여 “청과의 평화를 거부했던 대신들을 청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무력 시위였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0여 일이 지난, 1637년 1월 26일에 벌어진 사건이다,

일부 신하들마저 무력시위에 나선 병사들을 두둔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년) 1월 26일자 기사 중 어느 신하의 이야기를 요즘 투로 옮기면 이렇다.

“군사들은 이미 동요될 대로 동요됐습니다. 지시가 먹히지를 않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부모와 처자를 잃은 이들이기에, 전쟁하자고 했던 대신들을 원수처럼 여깁니다. 전하, 내일쯤 전쟁 하자고 했던 사람들을 청나라 진영에 보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나흘 뒤, 인조는 청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 항복 문서 쓰며 스타일 다 구겼지만 정작 청에서 옥살이

항복 문서는 최명길이 작성했다. 때문에 그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후대의 선비들로부터 내내 받는다. ‘을사 5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처럼 최명길은 살아생전에라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을까? 천만에!

최명길은 여전히 중원을 장악했던 명나라에 외교 문서를 보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에 항복한 것’이라며 줄타기 외교를 했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됐다. 1642년 청나라에 소환됐고, 이후 1645년까지 청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 해 봄, 조선에 돌아온 그는 2년 뒤에 사망한다.

전쟁 뒤에도 조정 대신과 선비들의 ‘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힘을 전혀 갖추지 않았음에도 ‘선비 정신’은 여전했다. 명이 망한 뒤에도 ‘숭명배청’(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함)을 이야기했고, 끝내 이뤄지지 못할 ‘북벌’을 주장했다.

이러니, 나라를 구하려다가 타국에서 옥살이까지 했던 최명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는 무척이나 박할 수밖에... 그가 죽자, 사관(史官)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렇게 평했다.

“명길은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다. (중략) 청과 평화를 주장했기에 올곧은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전쟁을 주장한 대신들을 청나라 진영으로 보냄으로써 사적 감정을 풀기도 했다. 병자호란 뒤 한양으로 되돌아간 후로는 잘못된 사람들을 등용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소인(小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에는 문제 해결을 절대로 피하지 않았고, 일을 할 때는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해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시대를 구한 재상이라고 부를 만하다.”(인조실록 25년-1647년- 5월 17일자)

지식인의 말이 때론 그 어떤 오물보다도 구역질 날 수 있음을 필자는 이 글에서 느낀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동원된 지식인의 말과 글은 그래서 공허할 때가 많다.

평자는 분명 최명길이 권모술수가 많고, 자신의 사적 감정을 풀기 위해 정적을 죽을 곳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소인으로 불렸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그래도 최명길이 일은 잘 했고, 나라를 구했다”고 칭찬한다.

소인이라며? 권모술수가 강하다며?

한데 나라를 구한 재상이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권모술수가 강한 소인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자진해서 들락거리며 나라를 구할 동안, 선비 정신에 충실한 그 숱한 고매하신 대인 나리들은 도대체 어디서 뭐를 했던가? 그리도 나라를 생각했다면 전쟁터로 나아가서 단 한 번이라도 칼, 아니 호미라도 휘둘러서 적에게 생채기라도 냈어야지! 간사하고도 요망스럽기만 한 평가라고 필자는 본다.

■ 병자호란을 떠올린 까닭

400년 전 병자호란을 떠올린 것은 의사 총파업이 자칫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 농성전처럼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지는 게 인지상정.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청년의 패기로만 세상을 살기에는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물론 이런 태도는 ‘비겁해짐’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나이가 들면서 비겁해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 속에서 전략과 전술을 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충과 효, 명(明)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주전(主戰)을 그리도 외쳤던 조선 선비들이었지만, 정작 병자호란이 터지자 대부분 호미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 현실 아니었던가!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묻고자 한다. 파업에 정말로 절대 다수 의사가 참여할까?

■ 의사 총파업론에 한유총 참패가 겹쳐지는 까닭은?

파업 이후의 그림은 분명하게 그릴 수 있다. 여론은 '건보 재정의 파탄‘이나 ’턱 없이 낮은 외과계 수술 수가나 산부인과의 몰락‘ 등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몇몇 좌파 전략가들은 ’진찰료 30% 인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의사집단을 ’오만한 엘리트‘로 몰아갈 것이다. 그 비난을 등에 업고 정부는 의사 집단을 코너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월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이하 한유총)의 파업 때를 생각해 보라. 한유총은 기세 좋게 파업을 선언했지만, 정부는 한유총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고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한유총은 힘 한 번 쓰지 못한 채 파업 하루 만에 정부에 ‘무조건 항복’했고...

정부가 의사들에게는 과연 다르게 대응할까? 총파업이 벌어진다면, 의협 집행부나 의협 대의원회 주요 인사 구속은 물론, 파업 참여 의사 중 주요 가담자급에게 검찰이나 경찰에서 소환장을 발부할 것이다. 파업에 참여한 일부 병의원에 국세청에서 세무조사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고통, 견딜 자신이 있으신가? 물론 의협 집행부와, 일부 의협 대의원님들은 그것을 기꺼이 견딜 것이다. 몇몇 평의사님들도 인고의 행렬에 사명감을 가지고 동참할 것이고.

하지만 대다수 의사들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조선 병사들이 모두 매국노여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일상의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 ‘최명길’의 목소리도 내고, 들어야 할 때

바로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최명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정부가 수가와 관련해서 거짓말과 말바꿈을 밥 먹듯 했으니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룰 때, ‘여론은 어떠하며, 그 여론을 의사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가져올 방법은 없는지, 더욱 효과적인 전략 전술은 없는지’ 등에 대해 누군가는 일부러라도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듣기 싫더라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사들의 파업 혹은 투쟁은 의사와 정부‘만’의 싸움이 절대로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공공성이 지극히 강한 분야이다. 때문에 의사와 정부 간 싸움은 결국 누가 대중의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만약 의사들의 주장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볼 필요조차 없다. 의사가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는 세력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냉정하게 의사들의 전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진찰료 30%’ 인상이 국민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질까? 의사들이 예전에 비해 먹고 살기가 많이 힘들어졌다고? 폐업하는 병-의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맞는 말씀! 한데, 그 힘듦이 과연 의사들만의 일일까? 삶의 신산함이 의료계에만 닥친 것일까?

통계청의 2018년 8월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규직 노동자의 2018년 6~8월 평균 월급은 300만 9000원이었다. 비정규직은 164만 4000원이었고... 필자가 듣기로는 서울 강남에서 건물 청소를 하면 월 15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그 자리를 얻기 위해 800만 원의 ‘웃돈’을 내야 한다고 한다. 실업률은 사상 최고이고... 참으로 살아남기 힘든 세월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저 임금은 얼마 올랐는데, 수가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과연 먹히기나 할까? 의사들의 평균 월급은 1304만원(2017년 기준)이라고 정부는 의사 총파업이 거론될 때마다 들고 나오는데? 직업별 평균 수입은 의사가 변호사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은 ‘1위’라는 게 정부 통계인데?

왜 의대 커트라인이 지난 20년째 최고를 차지하고 있고, 부모들이 왜 기를 쓰고 자기 자식들 의대를 보내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이야기하면 할수록 ‘덧나는 상처’가 되는 것이 의사의 평균 수입이라고 필자는 본다.

■ 의사에 대한 사회적 존중 높아지고, 수가 0.1% 더 오름이 최선일수도

의사 총파업 주장 자체를 반대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사회에서 정책이 어찌 결정되는가를 생각한다면, 파업을 주장하더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아니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할 방법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모두가 ‘전쟁’을 이야기할 때, 최명길처럼 누군가는 ‘평화’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황에 따른 다양한 대처가 가능하다. 의사들이 한유총의 전철을 따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 ‘진찰료 30% 인상’이나 총파업처럼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큰 주장보다는 국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법 개정이나 제도 개선에 ‘포격’을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 묻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의사들의 사회적 대우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수가 인상이 단 0.1%라도 더 되는 것을 바라자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가, 아니 과반이, 아니 3분의 1 정도라도 파업에 ‘지속적으로’ 동참한다면 필자의 주장은 헛소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의사 선생님들! 구속과 세무조사, 더 나아가 면허취소까지도 감내할 그런 투쟁, 가능하신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 하시라!


‘전쟁’을 밥 먹듯 이야기하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여전히 “전쟁하자”는 말만 앞세웠지, 적을 향해 칼은커녕 호미 한 번 제대로 들지 않았던 숱한 조선 선비의 전철은 밟지 마시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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