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까지 치료한 장기려 박사를 추모하며
마음까지 치료한 장기려 박사를 추모하며
  • 전성훈
  • 승인 2019.06.2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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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41)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어떤 변호사가 존경하는 인물로 의사인 장기려 박사를 든 글을 보았다. 그 변호사는 자신이 그분과 같은 삶을 변호사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지,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르려 노력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고까지 하였다.

장기려? 첫째 어렸을 적에 웬만한 위인전은 다 읽었다고 자부하는 필자에게 낯선 이름이었고, 둘째 변호사가 의사를 존경한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분인지 찾아보았고, 그분의 삶이 필자에게 큰 울림이 있어 이렇게 글을 쓴다.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1928년 송도고등보통학교,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 외과의사 백인제의 제자로서 수련하였다.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1947년부터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로 재직했다. 김일성을 수술해 준 인연이 있어 그는 북한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의사의 본분에 따라 부상당한 인민군들을 치료하다가, 국군의 평양 수복 이후에는 국군들을 치료하였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평양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그를 남쪽으로 가는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는데, 원래는 그가 먼저 출발하고 후에 부모님, 부인, 5남매가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짐을 들어주기 위하여 차남만 얼떨결에 동승하게 되었고, 결국 가족은 따라오지 못하게 되면서, 이것이 가족과의 45년간의 이별의 시작이 되었다.

장기려 박사는 월남한 직후인 1951년 1월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고,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그는 박애의 인술가(仁術家)이기 이전에 탁월한 의술가(醫術家)였다.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그는 간의 혈관과 미세구조 등에 대한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으며, 1974년 한국간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대한외과학회 회장까지 역임하였다. 이렇게 그는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학 인재 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의료행정가이기도 하였다. 419 혁명 이후 공적의료보험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차츰 높아지자 박정희 정부는 1963년 의료보험법을 제정하였지만 강제가입이 아닌 임의가입이어서 실효성이 없었다. 의료보험이 실효성 있게 시행된 것은 1977년이었고, 그럼에도 수혜대상은 국민의 8.8%에 불과하였다. 그는 허울뿐인 의료보험제도로는 정작 의료보험이 절실했던 중소기업, 영세기업, 자영업, 농어민, 장애인 같은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하고, 1968년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표어 아래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청십자의료보험은 담배 한 갑에 100원이던 시절에 1인당 보험료를 60원으로 책정하였는데, 이렇게 보험료를 낮게 책정한 것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일종의 비영리단체로서 의료수가 중 인건비를 제외하고 책정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정부에서 의료보험제도를 확대하면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많이 참고하였는데, 한국의 의료수가가 동남아국가보다도 낮게 책정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말도 있다. 장기려 박사는 선의로 의사의 인건비를 제외하였지만 당시 정부가 이를 악용(?)하여 의사의 희생에 무임승차하는 제도를 만든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뭔지도 몰랐던 당시에 그는 집집마다 방문해서 취지를 설명하고 가입을 독려하여 보험료를 징수하면서 조합을 힘겹게 운영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희생으로 커다란 제도를 이뤄냈고, 의료 취약 계층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었다. 1989년 의료보험이 전국민의료보험으로 확대되면서 정부에 이를 양도하고 조합의 해산을 선언할 당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부산 지역 조합원수가 무려 23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실천의사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집 한 칸 없이 병원 옥상의 사택에서 지내면서 사망 며칠 전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쳤다. 그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85세의 나이로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는데, 그의 비문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계속 무료로 진료해 주어 복음병원의 경영이 너무 어려워지자 병원 운영진이 ‘앞으로 무료환자에 관한 것은 원장님이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부장회의에서 결정한다’라고 결의하여 결정권을 박탈당하자, 형편이 어려운 입원환자에게 “내가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도망가시오”라고 말하였다는 유명한 일, 복음병원 초창기에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수대로 나누어 식구수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고 자신은 아들 하나뿐이므로 운전기사와 같은 월급을 받은 일, 1985년 남북관계의 일시적 해빙기에 정부가 배려하여 특별방북대상으로 선정하였으나 ‘나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방북을 사양한 일,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평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일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의사를 압박하고 사람들을 의술을 ‘서비스’로 인식하는 현재의 의료 현실을 보면 장기려 박사는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현재에 의사로서 일한다 하더라도 가장 낮은 곳에서 박애와 헌신의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신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무교회주의자였던 그는 ‘진실되게’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의 삶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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