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2:01 (금)
모리스 라벨 (스페인 광시곡)
모리스 라벨 (스페인 광시곡)
  • 오재원
  • 승인 2019.06.17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클래식 이야기(474)

■ 스페인 특유의 향취를 세련된 라벨의 어법으로 재해석
라벨은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령의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 전체에서 스페인 특유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여러 모로 스페인과 관련 있기 때문에 이 곡의 유래를 그의 출생 지역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라벨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바스크 지방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차라리 19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의 이국 취향과 스페인 선호 경향과 연관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러한 작품으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랄로의 바이올린협주곡 <스페인 교향곡>, 드뷔시의 <이베리아> 등을 들 수 있다. 라벨도 이 곡과 비슷한 시기에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하바네라 형식의 보컬리즈>, 오페라 <스페인의 한 때> 등을 작곡하였고, 이 곡을 구상하고 작곡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샤브리에의 광시곡 <에스파냐>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에서 영향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스위스의 시계장인’에 비유한 바 있다. 그의 관현악기법과 상상력이 얼마나 탁월했었는지 솜씨가 정밀하기로 이름난 스위스 시계 장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적인 정밀함은 그가 공들여 몰두했던 신고전주의적 경향과 관계가 깊다. 섬세한 감각으로 견고한 형식미를 드러내면서도 정돈된 우아함을 질서정연하게 표현했던 신고전주의는 선배 작곡가 생상스가 정의한 프랑스 음악의 특징, 즉 ‘음악은 주관적 감수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완벽한 절대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명제와 잇닿아있다. 이런 기법으로 무소륵스키의 피아노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편곡하여 원작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의 첫 번째 본격 관현악 작품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스페인 민속음악을 직접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향토성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 특유의 향취를 세련된 그만의 어법으로 재해석했다. 균형잡힌 비트와 악센트는 원색적 리듬을 강화했고, 민속 악기의 특징적 주법을 따온 악상들은 이국의 찬란한 풍경을 펼쳐 놓았다. 그와 친했던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는 이 부분에 관해서 “라벨의 광시곡은 나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스페인 기상곡>을 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그의 스페인 색채는 민중의 자료를 그저 이용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이 우리 민요의 리듬, 선법적인 가락, 장식 음형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작곡가 고유의 방식을 조금도 변질시키지 않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스페인 광시곡>은 1895년 자신이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하바네라>에 다른 세 곡을 덧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1907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그 악보를 관현악용으로 고친 후 1908년 2월 ‘밤의 전주곡’, ‘말라게냐’, ‘하바네라’, ‘축제’ 등 네 곡으로 구성하여 발표하였다.

△제1곡 밤의 전주곡(Prelude a la nuit) 관능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젓한 밤의 정취 속에 아련한 향수의 느낌이 담겨 있는 야상곡풍의 음악이다. 서주에 바이올린 파트가 연주하면 잠시 뒤 그 위에서 클라리넷의 선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의 주제는 순차 하행하는 네 개의 음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형식은 제2곡과 제4곡에서도 나타난다. 클라리넷은 주요 악상 외에도 화려한 카덴차를 이끌어내며 이국적인 색채를 주도한다.

△제2곡 말라게냐(Malaguena) 스페인 말라가 지방의 민속춤곡으로 곡의 전반부와 말미에 말라게냐 리듬이 활용되었다. 전반부는 트럼펫과 캐스터네츠 리듬이 돋보이며 활기차게 지나고 후반부 고즈넉한 선율의 잉글리시 호른이 투나딜랴(작은 노래) 풍의 고즈넉한 선율을 연주한다.

△제3곡 하바네라(Habanera) 아주 천천히 느긋한 리듬이 전개되면서 두 가지 하바네라 리듬에 기초하면서 정밀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라벨의 섬세하고 교묘한 기법이 가장 잘 나타나있다.
△제4곡 축제(Feria) 디베르티멘토 형식으로 5개의 민요선율이 사용되었다. 스페인 서민들의 축제 같은 열기와 활력이 생생하게 분출되지만, 중간을 지나면서 잉글리시 호른이 탄식의 노래를 섬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드러내면서 라벨의 정열과 절묘한 균형미를 엿볼 수 있다.

■ 들을 만한 음반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Decca, 1957) △앙드레 클뤼탕스(지휘),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EMI, 1961) △샤를 뮌슈(지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RCA, 1956) △피에르 불레즈(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DG, 1993) △샤를 뒤투아(지휘),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Decca, 198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