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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화국’…환자 몰래 녹음해도 될까?
‘녹취공화국’…환자 몰래 녹음해도 될까?
  • 전성훈
  • 승인 2019.05.27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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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38)
전성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실제 상황 1 : 성형외과 의원 진료실에서 환자와 의사가 싸우고 있다. 환자가 말한다. “OOO 눈처럼 해 주신다고 했잖아요!” 의사가 받아친다.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어요? XXX님 눈은 OOO처럼은 될 수가 없어요!” 환자가 언성을 높인다. “계속 그러실 거예요? 저 선생님 얘기한 거 다 녹음했어요!” 의사가 피식 웃는다. “저도 XXX님 얘기한 거 다 녹음했어요. 어디 한 번 맞춰봅시다.”

실제 상황 2 : 증권회사 직원과 고객이 싸우고 있다. 직원이 말한다. “제가 ◇◇화학을 추천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고객님이 하신 거예요. 저는 추천만 한 거라구요.” 고객이 말한다. “그게 추천이에요? 강매지! 가진 주식 전부 팔고 이거 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 딸들 주식도 다 팔아서 이거 사라며?” 직원이 버럭 받아친다. “제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어요?” 고객이 휴대전화를 꺼내 흔들면서 말한다. “지난 8년간 통화한 거 전부 다 녹음되어 있어요. 어디서 오리발이에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그리고 녹취공화국이다. 작게는 부부간 이혼 재판에서, 크게는 정치인의 선거법위반 재판에서, 더 크게는 대통령의 탄핵을 초래한 국정농단 재판에서도 전화통화/대화 녹취록은 예외 없이 사건의 도화선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왜 이렇게 녹취가 성행할까? 어떤 심리학과 교수는 “녹취로 증거를 남겨놓으려는 현상은 불신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그 지적대로, 거짓말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회분위기상,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언제 상대방의 말이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고, 따라서 ‘일단 녹음하고 보는’ 행태가 만연해 있다.

방론으로 우리 사회가 거짓말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위증죄와 무고죄로 처벌받는 사람의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크게 높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돕기 위하여, 또는 미운 사람을 벌 받게 하기 위하여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다.

의사들이 필자를 만나면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는 이것이다: “환자 몰래 녹음해도 되나요?”

그러면 필자는 이렇게 답한다. “처벌되지는 않습니다. 단 위법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의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묻는다. “위법한데 처벌은 안 된다구요? 그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필자는 다시 답한다. “해도 되는데 위자료를 줘야 됩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안 줘도 될 수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질문한 사람은 ‘더 헷갈리네. 괜히 물었다.’라는 표정을 짓는다.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법이 있다. 이 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면서, 위반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있다. 몇 가지 퀴즈를 풀어보자.

퀴즈 1: 5명이 한 자리에서 대화하고 있는데 그 대화자 중에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1명이 전체 대화를 녹음하면 어떠한가? 이 경우 말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한 자리에서 대화 중인 대화자에 해당하므로 처벌되지 않는다.

퀴즈 2: 방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대화를 복도에서 방문에 귀를 대고 엿들으면 어떠한가? 이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청취한 것에 해당하므로 처벌된다.

퀴즈 3: 여의도 광장에서 시비가 붙은 두 사람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는데 이를 녹음하면 어떠한가? 이는 ‘공개된 대화’에 해당하므로 처벌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보고 ‘그럼 대화자로서 녹음하면 처벌되지 않고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라고 물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본 것은 대화자의 녹음은 ‘형사적으로’ 처벌되지 않는다는 것뿐이고, ‘민사적으로’는 다르다.
법원은 대화자라고 하더라도 비밀녹음은 상대방의 ‘음성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므로 원칙적으로 위법하고, 상대방에게 위자료(보통 100만 ~ 300만 원)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단 비밀녹음을 정당화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의무가 없다. 법원이 인정하고 있는 ‘정당한 사유’는 ①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녹음자 자신의 권리보호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② 국민의 알 권리 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녹음자와 통화하면서 녹음자를 협박하고 있는 경우, 상대방이 그간 부인하던 민사상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경우, 국민적 관심사에 관하여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인터뷰를 녹음하는 경우 등에는 비밀녹음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원칙적으로 위법하고 법원이 손해배상까지 명하는 비밀녹음이 우리 사회에서 성행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원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사사건에서는 비밀녹음을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이 있지만, 민사사건에서는 법원이 이른바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비밀녹음도 증거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관은 신이 아니고, 세상사 무 자르듯 분명한 것은 거의 없다. 게다가 양 당사자가 소송까지 제기하여 극렬하게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면 법관도 누구 말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지속적으로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관 입장에서는, 분쟁 당시 양 당사자가 실제로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지를 들어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법원이 비밀녹음을 증거로 받아주지 않으면 비밀녹음은 금방 근절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렇게 자기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게다가 심각한 불신사회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라도 ‘유사시’를 대비한 비밀녹음의 유혹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들을 위한 현실적인 결론은 이렇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환자 몰래 녹음해 두자. 단 사용에는 최대한 신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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