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시학(詩學)
늙음의 시학(詩學)
  • 유형준
  • 승인 2019.05.2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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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73)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지난 100년 동안 이른 바 선진국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거의 두 배로 길어졌다. 수명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는 오늘날 ‘늙음’을 생로병사의 자연스러운 순서로만 보지 않고, 사회 전반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는 상황에 와 있다. 아직은 불확실한 이유로, 늙음을 학습과 성장의 마감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는 지금 당면한 도전이다. 노년기를 학습과 성장의 또 다른 단계로 받아들이려면 문자 그대로 늙음을 평가 절하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한다. 아마도 이러한 평가 절하는, 노인 인구의 급증에 당황하여, 늙음의 가치를 아직 제대로 헤아려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고 있는 일시적 혼돈이라 생각한다.

현대과학은 늙음을 생물 의학적으로만 헤아리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매우 제한된 경향은 나름대로 인류의 건강과 생활에 일정 부분 이득을 주었고 주고 있다. 반면에 늙음과 관련된 인간의 발달과 성장 등의 측면을 생각해 볼 겨를을 가지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늙음을 질병과의 관계에서만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골몰하는 이들도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뜻깊은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 통렬할 정도의 믿음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의 독창적 표현 속에, 우리가 하는 일 속에, 우리가 택하는 선택 속에, 우리가 삶의 스토리를 쓰고 또 다시 이어 쓰는 가운데에 뚜렷하고 분명하게 그 영향이 드러나 있다.

늙음을 보는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각자의 인생 궤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쩌면 늙음을 보편적으로 정의하는 것, 심지어 정의하려는 의도 자체가 딱한 일일지도 모른다. 늙음은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서술로 담아내어야 본디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는 서사(敍事)의 소재라는 생각이다. 즉, 연구 논문이 아닌 오디세이아와 같은 서사시로 표현하는 게 늙음의 정의에 보다 접근하는 방식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접근을 샌프란시스코의 실존 인문주의 연구소 소장이며 AgeSong[늙음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 기관] 창설자인 샤바항이(Nader Robert Shabahangi)는 ‘늙음의 시학’이라 칭한다. 시학은 말 그대로 시에 관한 학문 내지 이론을 뜻한다. 늙음에 대한 시(詩)적 레토릭[수사학]은 우리가 진료실 속에서, 흰 가운 속에서 생물 의학적으로 측정된 기능으로서 인지하고 있는 늙음에 대해 포괄적인 견해를 갖게 하는 힘이 있다.

일생이 한 편의 시라면, 늙음은 배우고 경험하고, 투쟁하고 우려하며, 용감하고 창의를 발휘하는 일생의 클라이맥스다. 청년기와 장년기는 노년 시절에 쓸 마지막 구절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때라고 볼 수 있다. 청장년기엔 우리의 내적 삶과 외적 삶의 동력학에 초점을 두었다. 내적. 외적 역량을 키우고 자신의 위상을 발전시키는 균형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시기였다. 늙음의 시학에서 바라보면, 인생의 모든 세월은 인생의 마지막, 고령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삶의 축적으로 이해된다. 늙음을 시학적으로 바라보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시 읽기, 듣기, 짓기, 낭송하기 등이 있다. 한층 더 적극적인 행위라면 시테라피, 시낭송 테라피가 있다. 이 중에서 시낭송 테라피는 표현 요법 영역에 속하는 독특한 형태의 심리 요법이다. 시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낭송함으로써 인격 성장, 치유, 그리고 자기 인식을 촉진시킨다. 시낭송가가 시를 낭송하거나, 참가자가 낭송하게 하거나, 또는 함께 낭송하여 공유 및 청취 과정을 통해 감성적 반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치유기전을 작동한다. 마침 최근에 시낭송 테라피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한 시낭송가가 운영하고 있는 강좌 가운데 한 시간이었다. ‘건강한 시낭송 테라피’를 주제로 하여 ‘건강한 늙음’을 부제로 달아 진행하였다. 이번 강의에선 신경림 시인의 「별」을 테라피 도구로 사용하였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별’/신경림

눈 어두운 노인이 본 것은 천문학적 별이 아니라 늙음만이 볼 수 있는 별이다. 젊어서는 보지 못했던 별. 늙어서만 볼 수 있는 별. 별처럼 빛나는 경이로움, 밝음, 순리, 혹은 에스프리(esprit, 시정신)… 잃고 얻는 과정이 성장이다. 시력이 어두워지고, 대신에 더한 것을 볼 수 있게 시력이 깊어지는 경이로움을 낭송으로 전해주었다. 낭송에 동참한 노인들의 시적 감성이 자극되어 늙음의 가치가 성장하였다. 늙음의 시학을 실습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늙음에게 시학이 반드시 필요할까? 꼭 그렇진 않다. 시학을 몰라도 뛰어난 시를 지을 수 있듯이, 늙음의 시학 없이도 그 늙음은 성장할 수 있다. 늙음의 시학보다 더 가치 있는 건 늙는 일이다. 그러나 시학의 세계에서 조금 더 또렷해지는 사실이 있다. 삶과 늙음은 모두 동등한 의미를 지닌다. 삶과 늙음의 과정은 분리 될 수 없다. 늙음이 없으면 삶도 없고, 삶이 없으면 늙음도 없다. 따라서 늙음을 방지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삶을 방지하자고 제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늙음이 질병이라고 믿는 것은 삶을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늙음의 시학은 늙음을 값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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