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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근시 - 슬픔보다 기쁨이 길었으니
회근시 - 슬픔보다 기쁨이 길었으니
  • 유형준
  • 승인 2019.05.13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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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72〉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결혼한 지 육십 주년이 되던 날, 다산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칠십 사년 가까운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회근시'는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뜨기 사흘 전에 결혼 육십 주년을 기려 미리 써 두었던 시로 그의 마지막 문학작품이다.

부부가 혼인하여 함께 맞는 예순 돌 되는 날 또는 그해를 회근이라 한다. 더 자주 쓰이는 회혼(回婚)과 동의어다. 원래 회근은 혼례 때 표주박을 둘로 갈라 만든 술잔을 돌리는 의식을 가리킨다. 근은 술잔을 의미하며, 술잔을 돌리는 의식을 담은 `혼례'라는 의미에서 `근례'라고도 한다. 혼례 때 신랑신부가 술잔을 나누는 절차인 합근지례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합근지례란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의식을 말한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서로 절을 나누는 교배지례가 끝나고 치루는 예식이다. 신부의 곁에서 도와주는 여자, 수모가 상에 있는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부에게 주어 약간 입에 대었다가 다시 받아서 신랑의 대반, 즉 신랑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준다. 신랑에게 주면 받아서 마신다. 답례로 대반이 다른 표주박에 술을 따라 신랑에게 주면 신랑이 입에 대었다가 대반을 통하여 수모에게 건네준다.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입에 대었다가 내려놓는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한 후 셋째 잔은 서로 교환하여 마신다.

그리고 안주를 들고 합근지례를 마친다. 합근지례도 대례상을 마주보고 행하며, 이때 사용하는 표주박은 두 개를 준비한다. 표주박은 청실과 홍실로 묶는다. 표주박이 없으면 술잔을 사용하기도 한다. 합근지례는 술을 교환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식이다. 즉, 지금까지 속해 있던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다산은 열다섯 살에 결혼한 한 살 연상의 홍혜완과 함께 겪은 육십년의 과거 저편과 임종 직전의 이편을 나지막하지만 봄빛 따스함으로 읊고 있다.

“육십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어도/복숭아꽃 짙게 핀 봄빛은 신혼 같구려//나고 헤어지고 죽음이 늙음을 재촉하나/슬픔보다 기쁨이 길었으니 ..... // ..... /지난 날 하피의 먹물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구려//헤어지고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의 본모습/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주려오”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로)/戚短歡長...(척단환장....)//...../舊時霞?墨猶痕(구시하피묵유흔)//剖而復合眞吾象(부이복합진오상)/留取雙瓢付子孫(유취쌍표부자손) - `회근시', 정약용

무어라 이를까, 화사한 봄날 같던 신혼. 이런 저런 곡절이 있었기에 지난 고락도 이제는 과거라는 소리로 남아 울려 번지고. 유배로 생이별하여 지낸 십팔 년도 지금은 감사할 뿐. 특히 강진 유배 중에 부인이 고이 접어 보내준 혼례 때 입었던 분홍 노을 빛 비단 치마로 만든 `하피첩(霞?帖)'. 다산은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하피첩'에 눅진하게 적어 넣었던 머리글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다섯 폭짜리 낡은 치마를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은 분홍빛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래 옅은 황색이 되었다. 서본으로 쓰기에 맞춤했다. 잘라서 작은 첩을 만들고, 손길 따라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준다. 훗날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양친의 꽃다운 은택을 떠올린다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리. 이름하여 하피첩이다. 붉은 치마를 바꿔 말한 것이다.”

늙음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늙음을 유쾌한 역발상으로 맞이하는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 잘 드러나 있다. 십팔 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일흔 한 살에 지은 `노인일쾌사' 속의 노인은 바로 다산이다. 다산은 쉰 여덟 살에 수염과 머리가 서리처럼 희었고, 일흔 한 살에는 거의 대머리가 되었고 치아도 남김없이 빠졌다. 겉모습 뿐 아니라 병도 잦아졌고 깊어갔다. 근육의 힘도 관절의 탄력도 약해져 잘 넘어지고 잘 접혀 발을 다치기도 하여 네 달이나 아파서 누운 적도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늙어가면서도 `이제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으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고'라고 노래한 다산의 여유는 긍정적 품격으로 오래 오래 다가서 있다. 삶 그리고 늙음을 `슬픔보다 기쁨이 길었'다고 마무르고 있다. 머리털도 치아도 죄다 빠지고 눈 어두워 병석에 누운 채.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늙은이 노릇을 할 수 없다'던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의 생각을 다산이라고 한번 쯤 안 해보았을까.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한 대목과 다산의 `회근시' 한 구절이 언뜻 겹쳐 지나간다.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존경과 효성으로 회혼례를 마련했다. 회근에 쓰일 표주박 술잔도 준비하고. 그러나 그들의 기쁨 넘치는 정성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회혼례가 열린 1838년 2월 22일 아침 고향집에서 눈을 감았다. 이태 후 부인은 다산의 뒤를 따랐고,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마현 집 뒤의 언덕에 다산과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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