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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으로 경제 위기…병가제공·상병수당 강화 필요
질병으로 경제 위기…병가제공·상병수당 강화 필요
  • 배준열 기자
  • 승인 2019.05.07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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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OECD 유일 사용자 법적 책임, 공적 영역 보장 모두 없어
대기업은 유급병가 의무화, 중소기업은 공적 재원 통해 근로자 보호 주장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던 A씨는 갑자기 쓰러지면서 뇌혈관 질환이 있음을 알게 됐지만 병원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회사에서 병가나 휴가를 사용할 수 없었고 업무량이 많아 직장을 그만뒀다. 질환 악화를 막기 위해 쉬는 동안 회사 퇴직금으로 생활하며 간헐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왔고 올해 초부터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건강상태에 맞는 일자리가 많지 않고 경력 단절로 인해 구직이 쉽지 않다. 직장 외에도 결혼 등 앞으로의 생활도 불안한 상태다.

대기업에서 정규직 엔지니어로 일하던 B씨는 입사 6개월 정도 된 시점에 사고로 뇌경막이 파열됐다. 회사 인사팀에서 병원에 다녀갔고 치료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권고사직을 받아들였다. 말초신경 장애가 남았지만 과거에 하던 일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라서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관련 직업훈련 등이 필요한 상태다. B씨는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C씨는 직장에서 하혈을 하고 병원에 갔다가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상병휴직 제도가 없어 이용 가능한 휴가들을 쓰다가 결국은 퇴사했다. 8개월 정도 지난 후 완치돼 원래 직장으로 재입사해 아프기 전과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재입사라는 이유로 근속수당 등을 받지 못해 월급이 낮아지고 말았다.

D씨는 과거 식당을 운영했지만 감기가 걸린 후 몇 달 동안 낫지 않고 무거운 짐을 드는 등 일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병원을 방문한 결과 천식 진단을 받았다. 식당 일을 하기 어려워져 가게 일을 중단했고 비슷한 시점에 아내와도 이혼했다. 자녀가 없었고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기초생계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힘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지만 학력이 높지 않아서 일을 찾기 쉽지 않다. 현재는 한 달에 3~4일 정도 일이 생기면 하고 있다.

위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대기업, 중소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 피고용자 등 근로 형태를 가리지 않고 일을 하던 상황에서 장기간의 치료나 입원을 요하는 질병이 발생할 경우 경제적 위기를 막을 수 없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기초생계수급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막기 위해 ‘병가제공에 대한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고, ‘공적 영역에서 상병수당’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원장·조흥식) 김수진 부연구위원은 최근 발간한 ‘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와 정책과제’를 주제로 한 연구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그간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이뤄져 왔지만 질병으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적 위험을 줄이기 위한 방안에 대한 논의는 적었다는 점에 착안해 본 연구가 이뤄졌다.

연구 결과, 질병 발생은 개인의 경제활동 참여와 근로소득 감소로 이어졌다. 가구근로소득 또한 감소했고 가구총소득에서 의료비를 제외한 재량소득이 빈곤선 이하인 비율도 증가했다. 질병발생 후 근로소득을 상실한 노동자들은 단기적으로는 근로 외 소득을 통해 의료비와 생계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수준이 낮은 경우 그 부담은 더 컸다. 질병 발생은 실직과 소득 상실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경제적 영향은 단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가구의 빈곤화를 야기할 수 있다.

중증질환을 경험한 직후 개인의 경제활동 참여 정도와 근로소득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최저임금 이하인 비율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구근로소득 또한 감소했는데 기준 중위소득의 50% 이하 소득을 받는 비율과 최저생계비 이하 근로소득을 받는 비율이 증가했다.

반면 가구총소득은 증가했는데 이는 민간보험 진단금 등 근로 외 소득의 증가와 관련이 있었다. 중위소득의 50%를 기준으로 빈곤화 정도를 평가한 결과 가구근로소득이 빈곤선 이하로 떨어진 가구가 증가했고 가구총소득에서 의료비를 제외한 소득 또한 빈곤선 이하로 떨어진 가구가 증가했다.

건강보험 직장여성코호트 분석결과, 개인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감소하지만 사업장 규모가 작은 경우, 부동산업이나 시설관리 등의 서비스 업종에서 더 크게 감소했다. 질병이 발생할 경우 사업장에서 고용되어 일하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실직을 경험했고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폐업을 선택했다.

사업장에 업무 외 상병 관련 휴가 혹은 휴직 제도가 있어 아픈 기간 동안에도 직장을 유지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관련 제도가 있는 경우에도 대부분 무급이었다.

가구는 가지고 있는 다른 사회경제적 자원을 이용하여 질병 발생의 충격을 완화하는데 아픈 노동자가 가구의 주 부양자인 경우에는 그 충격을 완화하기 어려워 대출, 자산 처분 등 근로 외 소득을 통해 의료비와 생계비를 마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질병이 단기로 끝날 경우 재취업 등을 통해 부채 등을 갚지만 질병이 장기화될 경우 만성적인 빈곤상태에 놓이게 된다. 재취업을 하는 경우에도 그 전보다 낮은 소득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에 갖고 있는 사회경제적 자원이 없는 경우 질병의 경제적 영향은 더 치명적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완화시키는 제도는 미흡한 실정. 공적 영역에서 상병 시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가 없으며 근로기준법은 업무 외 상병과 관련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기준을 정하고 있지는 않다. 공무원을 제외하면 사업장에 따라 취업규칙 혹은 노사협약을 통해 관련 규정을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규모가 작은 사업장이나 서비스 업종에서 특히 보호 수준이 낮다.

반면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과 공적 영역에서 상병급여 제도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아픈 노동자를 실직과 소득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 34개 국가 중 29개 국가는 두 가지 제도를 모두 이용하고 있었고 두 개 국가는 공적 현금 지원 제도만을, 세 개 국가는 업무 외 상병과 관련한 휴가와 휴직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었다. 두 가지 제도 중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김 위원은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병가 제공에 대한 사용자의 법적 책임 강화와 공적 영역에서 상병수당 도입을 제안했다.
 
김 위원은 “현재까지 정책 대안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상병수당을 도입하는 것에 맞춰져 왔으나 한국의 현황과 외국제도 분석 결과 관련 정책은 사용자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과 공적 영역에서 상병수당을 도입하는 두 가지 접근을 함께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우선 상병수당 도입과 관련해 “업무 외 상병으로 인한 실직의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업무 외 상병과 관련한 휴가/휴직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고, 상병 시 소득보장 제도도 마련해야 한다”며 “이는 현재 일부 기업에서 제공하는 유급병가 제도와 연계한 정책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대기업의 경우 노동자의 업무 외 상병에 대해 급여를 지급할 것을 의무화하고 그 외 규모가 작은 사업장이나 자영업자들에 대해서는 공적 영역의 재원 마련을 통해 노동자들을 소득 상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이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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