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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늙음' 붓 가는 대로 글짓기
`유쾌한 늙음' 붓 가는 대로 글짓기
  • 유형준
  • 승인 2019.05.07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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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71〉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노인일쾌사, 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 다산이 일흔 한 살 무렵에 쓴 여섯 수로 이루어진 `다산의 노년시'라고도 일컬어지는 연작시의 매 수의 첫 줄마다 나오는 글이다. 다산이 늙음이 가져다준 몸과 마음의 소함과 약함을 역발상으로 적은 글이다. 어쩔 수 없이 늙어가지만 잘 적응하여 유쾌하게 지내겠노라는 다짐으로도 여겨진다.

모두 열 수인 이 시의 다섯 번째는 나이가 들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유쾌함을 적고 있다.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어려워 잘 쓰지 않는 운을 달아 쓰려고 얽매일 것이 없고/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생각이 이르면 곧 써 내려가되/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이네/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곧바르지 아니하고 에돌아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비난할 자 그 누구리요/그 잘고 구차한 시격이며 시율을/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리/---중략---/어찌 비통한 말을 꾸미기 위해/고통스레 애를 끊일 수 있으랴/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나니/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붓 가는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縱筆寫狂詞, 종필사광사).' 글을 쓰는 기본틀이 중국 것이던 시절에 조선에서 나서 조선에서 살아온 그대로, 나이 들어 늙은 그대로 자유롭게 쓰고 싶은 걸 쓰겠다는 마음은 분명 유쾌 자체다. 배를 배맛으로 귤을 귤맛으로 느끼며 즐겨 먹는 그 즐거움과 전연 다르지 않다.

붓 가는대로 미친 듯이 짓는 글. 문학의 형식으로 보아, 산문이라면 수필에 해당된다. 수필은 영어로 `에세이(essay)'인데 `분석'을 의미하는`어세이(assay)'와 어원이 같다. 어떤 소재나 느낌을 철저히 분석하고 재구성하여 글로 써내는 것이 수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에세이'다. `붓 가는대로'가 아니라 `분석의 결과가 붓 가는대로 쓰이는' 글이 바로 수필이다. 수필은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며 조리와 정돈을 생명으로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잘 쓰인 한 편의 수필을 대하고 나면 흐리던 머릿속이 가슴의 박동에 맞추어 맑아지는 것은 바로 수필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다산의 미친 붓질은 이런 운필(運筆)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맞이하는 늙음을 어떻게 다산은 유쾌로 글을 지었을까. 그 답을 수필가 신길우의 생각에서 구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관조라는 것은 관찰과 달라요. 관조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앞서야 돼요. 또한 관찰은 견시(見視)와 달라요. `아 저게 사람이구나. 개구나. 꽃이 폈구나.' 그건 견시 수준이죠. 무궁화가 폈다. 그럼 가만히 살펴봐요 살펴보다가 관찰이거든요.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무늬, 점선을 더 자세히 알게 되죠. 관찰은 사물을 많이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름길이거든요. 본대로 인식하고 끝나면 일반인과 똑같아요. 관찰을 통해서 사물을 훨씬 많이 깊게 아는 것. 코스모스가 누가 얘기하는데 꽃잎파리가 몇 개냐 여섯 개냐 여덟 개냐 열 개냐 건성으로 보면 잘 기억 못해요. 그럼 여덟 개라고 하면 꽃잎 하나가 길쭉한 게 타원형이냐 끝이 날카롭냐 매끄럽냐 깊으냐 그런 것까지 문인들은 알아야하거든요. 톱니가 생겼다면 꽃잎 하나에 줄무늬가 있나 없나 세로선이 있나 없나 동일한 색이냐 점점 짙어지냐 그런 것까지 알려면 관찰해야 되거든요. 관찰을 통해서 그 사물의 섬세한 것까지 파악해야 쓸 수 있는 힘이 되는 거예요. 남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관찰한 대로만 쓰면 늘어놓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된다는 거예요.”
- `향기 있는 진료실', 박달회, 2017년 -

관조(觀照),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냉정히 응시함이다. 다산은 늙음을 주관을 떠나 그 본질을 냉정히 눈길을 한 곳으로 모아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바라보았고, 떠오르는 유쾌를 붓가는 대로 글로 지어냈다. `짓다'는 `낱말을 나열하여 글을 만들다'의 뜻과 동시에 `붓, 펜 따위로 획을 그어 글자를 이루다'의 의미를 지닌다. 늙어서 획을 그을 힘이 모자라 붓만 바라보고 있거나, 혹시 어렵게 획을 그었더라도 힘이 달려 그 쓰인 글이 흐릿하여도 그 글이 지니고 있는 늙음이 지어낸 뜻과 즐거움은 언제나 또렷하다.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던 날, 다산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칠십 사년 가까운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떠나기 사흘 전에 깊은 관조를 붓 가는대로 맡겨 미리 써 두었던 다산의 마지막 글인 `회근시(回짩詩)'[회근은 혼례 때 표주박을 둘로 갈라 만든 술잔을 돌리는 의식]로 글을 맺는다.

“육십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어도/복숭아꽃 짙게 핀 봄빛은 신혼 같구려//나고 헤어지고 죽음이 늙음을 재촉하나/슬픔보다 기쁨이 길었으니 임금님의 성은에 감사하오//이 밤 난사[중국 당대의 시] 소리 더욱 좋고/지난 날 하피의 먹물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구려//헤어지고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의 본모습/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주려오”
- `회근시(回짩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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