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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항로 `호모 비아토르'
인생항로 `호모 비아토르'
  • 유형준
  • 승인 2019.04.29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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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70〉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사람은 늘 무언가를 향하여 움직인다. 프랑스의 철학자·극작가·비평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는 말을 만들었다. 즉 `여행하는 인간'이다. 항상 길 위에 있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중이지 도중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끝을 정할 수 없고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성취를 성취하기 위해 계속 움직여 길을 가야한다. 종종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여 제멋대로 끝을 추정하고 그릇된 성취를 성취한 것으로 여기려 한다. 왜곡이다. 이 왜곡은 여행의 의미와 일정, 여행 중의 휴식을 맺힌 데가 없이 무르게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길은 이동의 공간만을 일컫는 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 탄생에서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 개인과 사회 간 모든 이동의 통로와 과정을 아우른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한 평생을 험한 바다의 뱃길에 견주어 인생항로라 한다. 시인 천상병은 어느 가을날 중국의 시인 두보[소릉은 두보의 호다-필자]의 운을 빌려 시를 짓는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 가는 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소릉조(小陵調)-70년 추일(秋日)에', 천상병

신산한 삶이 끊이지 않는 길 위에서도 삶의 깊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죽고 싶어도 갈 여비가 없어 고민이라는 아이러니로 연민의 공감을 끌어낸다.

시인의 말대로 저승 가는데 여비가 들까. 길도 가까운 길이 아니라 먼 길로 생각하여 먼 길을 가는데 필요할 거라 상정하여 죽은 사람이 저승길에 편히 가라고 상여 등에 돈을 꽂아준다. 노잣돈이다. 수의(壽衣)엔 주머니가 없으니 망자(亡者)가 실제로 그 돈을 쓸 리가 없다. 결국 이 돈은 상여꾼들이 거두어 나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생각이며 행위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노잣돈은 나의 주검을 잘 수습해 주는 정성과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즉, 노잣돈을 비롯하여 장례는 살아남은 자가 겪는 일이며 몫이다. 산 자들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잣돈이라 부르는 이유는 떠나는 이에 대한 이승의 마지막 인정(人情) 표현의 의미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인정의 끈을 이어 산자들의 심정을 스스로 데우고 싶은 바람일 거란 생각도 든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론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영혼의 세계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다. 그는 뱃삯을 내는 사람만 배에 태워주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장을 할 때 동전을 입에 물려주는 장례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카론은 시체의 입에 넣은 동전을 받았다. 일종의 노잣돈이다. 

장례식에 돈이 등장하는 풍습이 일본에도 있다. 군마, 사이타마, 치바의 일부지역에서 고인이 고령으로 사망한 경우에 장수의 인연을 잇도록 장례식 때 봉투에 동전을 넣고, 겉봉에 장례식 감사편지 등과 함께 장례식 참석자들에게 나눠준다. 오래 살다 가신 분의 기를 받으라는 뜻이다. 가까운 이웃 나라지만 일본에선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일본문화 일원론'에 영향을 받아 `죽으면 아주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산으로 간다'라고 믿는 까닭에 노잣돈 풍습은 없다.

일본의 이른바 장수전 풍습은 주로 90세 이상 장수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장수전이라는 이름의 동전을 조문객에게 나누어 준다. 이때에 쓰이는 동전은 일반적으로 5엔짜리, 10엔짜리를 주로 사용한다. 5엔의 일본 발음은 인연을 가리키는 `고엔(緣)'의 발음과 같다. 5엔짜리 동전을 장수전으로 나누어주면서 오래 오래 산 고인과 인연을 맺어 고인처럼 장수하라는 뜻이다. 10엔의 10을 일본 발음으로 `쥬'라 하는데, `아주 충분히'란 뜻을 지닌 쥬분[십분, 十分]의 첫 발음과 같다. 10엔짜리 장수전을 받아 고인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장수전을 받은 사람은 장수를 주는 부적으로 가방이나 지갑에 넣어두거나, 바로 버리거나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장수전은 장수를 누리고 죽은 망자와 장수를 바라는 산 자 사이의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다.

장례식의 노잣돈은 망자가 사용하지는 않지만 개념적으론 산 자들이 망자에게 쥐어 보내는 돈이다. 한편, 장수전은 망자가 직접 주는 건 아니지만 산자들이 받는 돈이다. 이처럼 형식적 차이가 많지만 인정을 바탕으로 망자와 산자의 연을 이어주려는 행위란 점에선 노잣돈과 장수전은 서로 개념의 길을 터주고 있다. 둘 다 망자와의 인연을 통해 산자들의 마음을 편케하려는 은근함이다.

호모 비아토르. 어떤 상태론가 옮겨가는 과정의 길을 끊임없이 가고 있는 사람. 그는 가기 위하여 열심히 숨 쉰다. 호사가의 계산에 의하면 사람이 칠십 평생에 오억 사천사백만 번 숨을 쉰다. 어찌 보면 길가는 건 숨쉬기다. 숨을 쉬다가 숨이 넘어가 끊어지는 게 죽음이고, 이즈음에 노잣돈, 뱃삯, 장수전이 쓸모 있게 된다. 그런 돈이 필요해지는 순간까지 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어떤 이는 우물쭈물, 어떤 이는 치열하게 숨 쉰다. 호모 비아토르의 숨쉬기에 관해, 미국의 국민 시인이며 최초의 흑인 베스트셀러인 마야 안젤루의 한 구절을 보탠다. `인생은 숨 쉰 횟수가 아니라 숨죽인 순간들이 얼마나 잦았는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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