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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원할 자, 그는 바로 그녀
지구를 구원할 자, 그는 바로 그녀
  • 유형준
  • 승인 2019.04.22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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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 〈10〉
캡틴 마블/지아이 제인

이 형 중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사상 최악의 모스크 총격 테러가 일어난 뉴질랜드는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평화롭기 그지없고, 죽기 전 꼭 가보고 싶던 그 곳이 아니었다. 테러 이후 국가경찰제도가 강화되어 인권을 침해하고, 테러 지휘자를 죽이든 살리든 잡아오라던, 히스패닉의 불법입국을 막기 위해 멕시코와의 국경에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진격의 거인'에서 식인 거인을 막기 위해 세웠던, 그리고 `월드 워즈'에서 좀비를 막기위해 세웠던 거대한 장벽)한 금발의 백인 남성 지도자에 의한 일련의 백인우월주의적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했었다. 공포와 슬픔으로 분열되었던 국민을 결집시킨 것은 재임 중 아이를 낳았던 39세 여성 총리 저신다 아신이었다. 무슬림 공동체를 만나기 위해 크라이스트 처치로 향한 그녀는 검은 히잡을 쓴 채 두 손을 마주 잡고 진심어린 슬픔을 표했다. 그녀는 흐느껴 우는 이들을 품에 안았고 그들의 얼굴에 뺨을 갖다 대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24∼36시간 동안 우리가 본 사건과 행동 중 뉴질랜드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러분들이 지금 보고있는 지지의 메시지이다” 의회 연설에서는 “목숨을 앗아간 남자(테러범)의 이름은 부르지 않겠다. 대신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호소했다. 온화해보이지만 차분하면서, 분열과 증오에 맞서며, 분열 대신 치유와 통합의 리더십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같은 날, 테러의 원인이 이주민 때문이라던 호주의 백인 남성 상원의원은 어린 학생으로부터 날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한다.

유일무이한(현재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 서방세계의 마지막 양심으로 대응하는 유로연합의 수장은 독일의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다. 그녀는 통일 이전 동독 출신이고, 정치와는 무관한 라이프치히 대학교 물리학 박사 학위를 가졌으며, 퇴근 후에는 경호원없이도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원칙으로 국내에서 수세에 몰리기도 하지만 노래하는 김무스를 닮은 백발의 미국 대통령과 대책없는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영국 수상과의 협상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을 보인다.

거대한 크기의 에로틱한 흑백사진으로 유명한 헬무트 뉴튼의 작품에는 남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남성복에나 어울릴법한 어깨가 넓은 수트를 입은 채, 혹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담배를 물고 있으며, 엄청난 높이의 힐을 신고 당당하게 세상을 응시한다. 그가 사진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이 단순히 이미지로서 소진되는 여성의 몸이었다면 패션잡지 `보그'에서 완전 나체로 앞으로 걷는 4명의 모델들을 표지에 싣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칼 라거펠트 역시 여성성을 재정의하는 파격적인 뉴튼 우먼의 등장을 탈(脫) 젠더, 포스트(post) 젠더(anti로서의 의미)로서의 아젠다로 읽은 바 있다.

영화 속에서 여성이 단독 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경우 남자 주인공을 보조하는 예쁘장한 MSG(맛소금?)이거나, 의지가 굳지 못해 감정에 치우쳐 플롯에 의도적인 혼선을 초래하는 필요악의 조연, 팜므 파탈(femme fatale)로 남성 주인공을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그도 아니라면 델마와 루이스처럼 남성(시스템)을 무시했다간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교훈을 일깨워주는 버디 영화 속 비운의 주인공일 것이다.

얼마 전 〈캡틴 마블〉이란 영화를 보았다. 허무하게 끝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에서 절대 빌런 타노스의 인피니티 스톤에 의해 절반이 사라져버린 위기의 마블 유니버스를 이끌어 갈 차세대 슈퍼 히어로는 캡틴 마블이란 이름으로 등장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최강의 히어로라는 닥터 스트레인지(그가 신경외과 의사였고, 예거 르쿨트르 손목시계를 찼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님)까지 없어진 마당에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아닌 그라고 적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바로 〈룸, 2015〉에서 모성애 넘치는 연기를 보였고, 〈콩 스컬 아일랜드, 2017〉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섬을 탈출하던 브리 라슨이었다.

영화는 끝난 후에도 묘하게 여운을 남기는데,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면 먼저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명제를 무의식 중에 다루었다는 점이다. 흉측한 외모로 볼 때 악당이 분명한 스크럴 족 탈로스와 그 반대로 머리숱이 많아진 훈남 주드 로가 분장한 크리족 전사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역전된다. 마치 〈비틀쥬스, 1988〉에서 사람을 혼내주는 귀신 비틀쥬스가 이제 막 죽어 유령이 된 주인공 부부에게 행동으로 비춰지는 현세적인 사람(유령의 반의어)을 믿지 말라고 충고하던 것처럼.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는 주인공이 반드시 남자일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귀띰으로도 해석된다.

다음으로는 주인공의 `평범한 외모'이다. 여성 히어로의 선배 원더우먼은 린다 카터에 의해 TV 시리즈물로 이미 인기를 얻은 바 있고 2017년 갤 가돗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스라엘 출신 여배우에 의해 이전에 비해 조금은 덜 육감적으로 그려진 원더우먼은 남자 못지않은(?) 힘과 지혜, 냉철함으로 적을 무찌른다. 여성에 의해 감독되고, 주인공은 중간에 출산을 하는 산고 끝에 탄생되었지만 슈퍼모델급 몸매과 비키니를 연상케하는 코스튬은 과연 원더우먼이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충족과 무관한 진정한 여성해방을 선도하는 연출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캡틴 마블은 성적매력과 무관(?)하게 인류를 구하는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정당성을 평가받는 최초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 중 군사훈련 과정에서 장애물을 넘지못해 나뒹구는 장면은 이전 〈지아이 제인, 1997〉에서의 홍일점의 네이비씰 훈련병이 흙탕물에 넘어진 장면처럼 여성성을 시험받는 장면의 명백한 오마쥬이다.

브리 라슨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캡틴 마블은 위대한 페미니스트영화이다. 대본에는 내가 늘 여성으로서 싸워야만 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알려지면서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를 당했다. 남녀 차이를 잊는다면 영화는 단지 히어로가 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홀로 당당히 일어서는 여성 슈퍼히어로에 대한 담론은 여자가 남자의 도움(파트너) 없이도 스스로 유리천장을 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시도는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되며 벽을 깨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성적 역할과 차별에 대한 논란은 소모적일 뿐이며 건전하고 생산적인 성역할을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

`82년생 김지영' 소설과 영화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반은 여자이고, 그 나머지 반만 만족하는 세상이란 바람직하지 않다. 남자에 의해 주도되었던 권력주도형의 마초문화로 점철된 이 세상이 교감과 포용을 지닌 여성에 의해 확장된다면, 남성과 여성이 서로 피해의식을 갖지 않고 일대일로 공정한 세상을 이끌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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