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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빠르네
세월 참 빠르네
  • 유형준
  • 승인 2019.04.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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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69〉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나이 들어가면서 하는 말 중에서 사용 빈도가 점점 잦아지는 걸 하나 들라면 `세월 참 빠르네.'를 빼놓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쏜 살 같은 세월'이란 경구를 사용하지만 늙으면 늙을수록 세월이란 이름의 화살은 점점 더 빨리 날아가는 것 같아서다.

흔히 `시간만큼 공평한 게 없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나 똑같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신나게 노는 시간과 중요한 시험의 합격 여부를 기다리는 시간의 속도가 같지 않다는 걸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시계로 보는 물리적 시간은 절대적으로 누구나에게 다 똑같지만, 심리적으로 겪는 시간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사람이 똑 같은 상황에 처해도 그 때마다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다르다. `열 살짜리 아이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쉰 살의 남자는 50분의 1로 느낀다'는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Paul Janet)의 의견은 그러한 느낌을 계량적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왜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가? 예전보다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나이와 시간의 속도에 대한 적지 않은 연구 결과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생체시계가 느려져 외부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생체시계는 말 그대로 몸 안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 시스템으로 예를 들어 음식을 먹기 전에 위에서 위액이 미리 나와서 음식이 위에 들어오면 소화시킬 준비를 하고, 잠자고 깨는 시간적 기능 체계를 가리킨다. 생체 시계는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기 위해 필수 불가결 한 것으로 타고 난다고 알려져 있다. 늙으면서 바로 이 생체시계는 느려지는데 몸 밖의 물리적 시계는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가므로 상대적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리적 시계는 변함없는 속도로 가는데 우리 몸의 생체 시계는 나이가 들면 왜 느려지는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아직 없다.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의 저자인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인생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시간에 대한 온갖 환상들 중 일부'라고 한다. 그의 표현이 다소 애매모호하다.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일'인 `환상'은 `실제와는 다른데도 실제처럼 깨닫거나 생각하는'현상인 `착각'과 닮은 점이 많아서 `환상'을 `착각'이란 말로 바꾸어 써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란 해석이다. 이 착각이 일어나는 원인은 아직 정확히 모른다. 다만 이리저리 설명해보려는 여러 이론이 있다. 그 중에서 쉽게 수긍이 가는 것은 `뭔가를 기다리며 잔뜩 기다리고 있을 때 시간이 느리게 가고, 하루하루가 똑같을 때는 긴 일생도 짧게 느껴진다.'는 서술적 설명이다.

늙는 속도는 늙은 내가 살아가는 속도와 다르다. 늙음의 속도보다 더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늙음 속을 내가 살아가는 속도다. 수학 공식화된 시간이 아닌 참된 시간으로 지속을 주장하여 서양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렇다. 혹시 `순수지속'이란 말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들을 위해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의 저자 박영욱의 설명을 빌린다.

`약속 시간에 늦은 연인을 기다릴 때의 5분과 고된 작업 중에 갖는 5분간의 꿀맛 같은 휴식은 같은 5분이 결코 아니다. 이 차이는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느껴질 뿐이다. 이 질적인 차이를 가르는 직관적인 시간이 순수지속인 것이다.'
시간의 계량화에 대해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분절시켜서 본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말할 때 시계에 나타난 계량화된 수치로 생각한다. 우리는 아침 식사와 점심식사 사이에 다섯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식으로 계량화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활 위해서 편의적으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단절시킨 것일 뿐, 시간 자체의 특성은 아니다.'

나이 들면 `이제 좀 천천히 살라'고 한다. 점점 빨라지는 세월에 휩쓸려 덤벙대지 말고 자기 삶의 속도를 유지하라는 권면일 것이다. 주변에서 어떤 이는 엄숙하고 느린 라르고를 권하고, 다른 이는 `느리기만 하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노약해 보이기도 하고 더러 고집스런 성미로 보일 수도 있으니' 칸타빌레로 살라고 한다. 나와 세상의 안팎을 `물 흐르듯이 느리게 그러나 노래하듯이'어르라는 조언과 함께 비발디의 리코더 협주곡 제3번 라장조 `홍방울새'를 녹음한 파일을 보내주기 까지 했다.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참모습을 확인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그 까닭은 참모습이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모습에 못 미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늙음이 몸과 마음 곳곳에 충실하게 내려앉고 있는 나의 늙은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망설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망설임에 따른 느려짐을 벌충하기 위해 무정한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이려니 설미지근하게라도 믿으며 나와 함께 늙어가는 착각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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