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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보다 도전”…1000여명 얼음 위를 달리다
“기록보다 도전”…1000여명 얼음 위를 달리다
  • 하경대 기자
  • 승인 2019.03.1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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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블라디보스톡 아이스런 마라톤' 참가 오승재 정책이사
한국팀 20명 인솔 팀닥터 역할…“힘들었지만 큰 보람”

수세기 전 예수가 바다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는 성서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일화다. 한발 나아가 그리스로마 신화 속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으로 물 위를 걷는 것 뿐 아니라 바다를 자유자재로 지배했다. 이 같은 종교나 신화 속 이야기를 보면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행위를 통해 영웅이나 비범한 인물을 상징화하곤 한다.

그러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꼭 신화 속 영웅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 러시아 바다 위를 달리고 돌아온 의사가 있다. 바다 위를 달리며 육지에서와는 또 다른 감정과 의미를 느꼈다는 오승재 서울시의사회 정책이사를 의사신문이 만나봤다.

2월 23일, 출발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전 세계 참가자들이 바다 위를 질주했다. 정확히는 바다가 얼어버린 얼음 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만 대회 코스를 나타내는 GPS상 사진은 분명 바다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아이스런 국제대회는 블라디보스톡 루스키섬 노비크만 인근에 얼어붙은 바다 위를 달리는 이색 국제 대회다. 2016년 시작돼 매년 약 1000여 명 이상 세계 각국 참가자들이 특별한 경험을 위해 해당 마라톤 대회를 찾는다.

마라톤은 5km, 10km, HALF코스로 나눠지며 제한시간은 각각 2시간, 3시간, 4시간이다. 제한시간이 만료되면 참가자들은 결승선까지 특별 수송되며 얼음과 눈 위를 달리는 대회인 만큼 아이젠 운동화나 스웨터, 장갑, 양털모자 등 방한 용품을 갖추고 대회에 출전하는 참가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승재 이사는 현재 한국마라톤연맹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달리는의사들'의 멤버다. 소위 달리기 하나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지만 오 이사에게도 얼어버린 바다 위를 달린다는 경험은 특별했다. 그는 “러시아 대회 주최 측에서 참가 요청이 있었다. 한국마라톤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데 최근에 한국 참가자들 20여 명을 인솔해 팀 닥터 겸 블라디보스톡에 다녀왔다”며 참가 경위를 소개했다.

이어 “바다는 원래 잘 얼지 않는데 우리 다도해처럼 섬과 섬 사이에 배가 지나다닐 정도의 넓은 바다가 있다. 러시아 극동대 근처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곳의 바다가 겨울철 러시아의 추위로 얼어버리는데 그 곳에서 마라톤 대회가 진행됐다”고 전했다.

얼음 위를 달린다고 하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마라톤 대회가 열렸던 곳의 얼음 두께는 평균 60∼70cm에 달했다고 오 이사는 말한다. 사전에 대회 코스로 쓰일 얼음 두께를 측정해 50cm 이상 얼음이 확인돼야 대회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오 이사는 “마라톤 대회 내내 선두에 스노우타이어를 단 차량들이 마라톤을 진두지휘했고 안전문제에 대해서도 얼음두께를 수시로 체크하며 만약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얼음 위를 달린다는 것은 불편함이 따르는 일이다. 얼음 때문에 바닥이 울퉁불퉁하기 일쑤고 아이젠이 없으면 미끄러워서 넘어지기 쉬웠다.”

흔히 얼음 위를 달린다고 하면 디즈니 겨울왕국(Frozen)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상상하기 십상이나 현실은 달랐다. 일정하지 못한 지표면은 마라톤의 대표적 장애물이었고 아이젠 없이는 한발자국도 나가기 힘든 미끄러운 바닥은 전문 마라톤 러너들에게도 힘든 코스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힘든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힘든 만큼 보람도 크다고 했던가. 그는 “언제부턴가 그냥 눈 온 평지를 달리는 느낌 같았다. 코스별로 깃발이 코스와 비코스를 구분해 주고 있는데 살짝만 눈을 돌리면 눈에 덮인 광활한 광야 속에 나를 내던진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얗게 펼쳐진 은색 대지와 푸른 하늘 아래서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듯 그는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 갔다.

마라톤 대회가 이뤄지는 지역이 워낙 춥다보니 벌어지는 진풍경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그는 “해당 지역의 바다가 워낙 꽁꽁 얼다보니 마라톤 대회뿐만 아니라 주변 민간인들도 바다를 찾아 마라톤 대회가 진행되는 곳 옆에서 차를 세워두고 얼음에 구멍을 내 얼음낚시를 즐기는 등 재밌는 모습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즉 추위가 일상인 지역 주민들이 얼음과 하나가 된 모습에서 외지인으로서 소소한 재미를 느꼈다는 것. 그는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가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너무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물론 마라톤에서 순위와 수상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점이 달리기의 매력이라는 설명이다. 오 이사는 “한국마라톤연맹에서 회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나보다 수상 실적이 화려한 분들이 많다”며 “당연히 대회에 참가하며 실적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달리는 본연의 행위와 더불어 자연과 하나가 돼 달리는 동안 느끼는 감정과 그 순간의 분위기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편 마라톤이 끝나고 즐기는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 `반야' 체험은 덤이었다. 달궈진 돌에 물을 뿌려 발생되는 증기로 몸을 데우는데 나무 냄새가 향긋한 사우나 실안에서 땀과 노폐물을 빼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깨고 들어가 냉온 사우나를 번갈아 가며 즐기는 방식이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하루 종일 이어진 마라톤에 지친 몸을 블라디보스톡 얼음 바다와 뜨거운 전통 사우나에 번갈아 가며 몸을 맡겼던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라며 “이번 마라톤 대회 일정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물 위를 달린다는 것은 큰 상징성과 의미를 갖는다. 비록 얼어버린 바다라고 할지라도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 모두가 물 위를 달리며 지나온 곳 보다는 현재 내가 처한 환경에 초점을 맞춰 나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을 찾았을 것이다. 또한 인간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부족함을 느꼈으리라. 아울러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결승점 완주를 통해 한 단계 성장했을 대회 모든 참가자들이 부러워졌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강풍으로 인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고립되고 예수는 `바다 위를 걸어' 이들에게 다다르게 된다. 예수가 도착했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를 유령이라고 칭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결국 예수에 의해 강풍과 파도는 멈추고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되돌아보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번 마라톤 대회에서 예수의 일화가 떠오른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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